터키 아나키스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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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카라,
당신이 8월 12일에 보낸 편지에 오랫동안 답장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답장해야할 편지가 많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는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빠르게 답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질문 중 몇가지는 깊은 생각과, 길고, 정교한 답변을 요구하더군요.
같은 이유로, 당신의 모든 질문에 대답하려면 너무나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들 중 가장 중요하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답해드리겠습니다.
생애
카라: 언제/어디서 태어났나요?
저는 1942년 5월 22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카라: 어느 학교 출신이시죠?
저는 일리노이 주 에버그린 파크에 있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미시건 대학교에서 수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카라: 직업은 무엇이었죠?
미시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수학 조교수로 2년간 지냈습니다.
카라: 결혼하셨나요? 자녀가 있나요?
전 결혼한적 없고, 자녀도 없습니다.
문명에 대한 거부
카라: 당신은 수학자였었죠. 지금도 수학을 하시나요? 어쩌다가 생각을 바꾸게 되었죠? 언제부터 문명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나요? 언제부터 문명을 거부하기 시작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어쩌다가, 언제부터 숲에서 살기로 결심하셨나요?
이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하려면 너무 길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저는 11살 때부터 근대성과 문명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1살에, 저는 네안데르탈인들의 삶에 관해 읽고, 원시적인 생활 방식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6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는 문명을 벗어나 야생에서 사는 꿈을 꾸고는 했습니다. 그 시점에, 저는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의 지위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했으며,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며, 자신의 운명과 생활 방식을 거대 조직의 자비와 통제에 맡겨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이로인해 현대인의 생활방식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고, 저는 인류학 강좌를 몇개 들었습니다. 이 강좌들을 통해서 원시 인류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었고, 그들이 야생에서 생존할 수 있게해준 지식을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들어, 저는 식용 가능한 식물을 찾는 방법을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지식을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몇년 후 저는 식용가능식물에 관한 책을 찾고서 깜짝 놀랐어요. 제가 처음으로 접한 책은 Euell Gibbons의 "야생 아스파라거스를 찾아서(Stalking the Wild Asparagus)"였습니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을 때, 저는 시카고 근처의 숲에서 직접 식용가능식물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도로와 길을 벗어나 혼자 숲속으로 들어갔을 때, 음산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숲과 숲에 사는 식물과 동물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됨에 따라, 처음의 이상한 느낌은 사라졌고, 숲이 점점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저는 점점 인생을 문명에서 허비하는 것이 싫고, 야생의 장소에서 살고 싶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저는 수학을 잘했습니다. 수학 문제를 푸는게 재밌었어요. 하지만 저에게 있어 수학은 목적없는 활동이었기에, 근본적으로 지루하고 공허했습니다. 제가 응용수학을 연구했다면, 제가 싫어하는 기술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수수학을 연구했어요. 하지만 순수수학은 게임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때도, 지금도 왜 수학자들이 그들의 삶을 하찮은 게임에다가 허비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삶에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야생에서 살기. 하지만 저는 어떻게해야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몰랐어요. 그 시대에는 원시주의 운동이 없었고, 생존주의자들도 없었고, 어떤 사람이 앞길이 창창한 수학자로서의 진로를 포기하고 숲이나 산속으로 들어간다면 바보, 미치광이 취급을 당했죠. 제 주변에 제 생각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 깊이, 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현대의 삶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에, 24살 무렵 모든 희망을 잃었어요. 그 때 저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저는 너무 비참해서, 죽어도 괜찮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만약 죽어도 괜찮다면, 무슨 일을 하던 그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거에요.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자유다! 그것이 제 삶의 중대한 전환점이었어요. 전 그때 용기를 얻었고, 그 용기는 지금도 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쓰지 않고 조만간 야생에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돈을 모으기 위해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저는 일을 관두고, 숲에서 살 장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폭탄테러의 동기
카라: 어떻게/언제 폭탄테러를 결심했나요?
이 질문에 완벽한 대답을 하려면 너무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1983년 8월 14일자 일기를 인용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8월 5일 나는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내가 '대각선 협곡'이라고 부르는 협곡에 설치한 비밀 캠프에 도달했다. 8월 6일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숲의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곳에는 열매가 부족했다. 사슴이 몇마리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게다가, 트라우트 강 원류에 있는 아름답고 고요한 고원을 마지막으로 본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나는 8월 7일 그곳에 향하기로 했다. 크레이터 산 근처의 도로를 건넌지 얼마 안가 전기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로스터 빌 상류에서 들리는 듯 했다. 난 사람들이 나무를 베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그게 싫었지만, 일단 고원에 도착하면 그 소리가 안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 비탈길을 건너다가, 아래에서 원래 없었던 도로가 새로 깔린 것을 발견했다. 그 도로는 스탬플 강 근처의 능선을 가로지르는 것 처럼 보인다. 그것을 보자 역겨움이 느껴졌다. 하여간, 나는 계속 고원으로 향했다. 그 광경은 내 마음을 찢어놓았다. 고원에는 넓고 잘 포장된 도로가 교차로 형태로 깔려 있었다. 고원이 영원히 망가진 것이다. 고원을 되살릴 유일한 길은 기술 사회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 뿐이다. 참을 수 없다. 그 고원은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요한 장소였다.
한 도로는 몇년전 내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장소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깊은 슬픔과 분노를 안고서, 나는 사우스 포크 험벅 강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나는 오두막을 향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아름답고, 끓이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맑은 물이 나오는 샘에 들렀다. 거기서 나는 샘의 신에게 기도했다. 그에게 숲이 당한 짓에 대해 내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제 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난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었기에."
제가 해야만 했던 일이 무엇인지는 아시겠죠.
기술과 문명
카라: 어떤 이유로 기술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나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문명을 파괴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문명의 파괴를 앞당길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 완벽하게 답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의 글을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문명의 문제점은 기술의 문제점과 동일합니다. 우선, 제가 기술에 대해 말할 때, 저는 물리적인 도구나 기계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기술은, 예를들어, 화학, 토목공학, 생명공학과 같은 학문들, 이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기술, 예를 들어 선전기술, 교육심리학, 행정기술을 포함하는 겁니다. 기술 체제는 이러한 것들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기술이란 단어는 현대 기술 뿐만 아니라, 초기 문명에 존재했던 물리적 도구들과 기예(technique)들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쟁기, 동물에게 쓰는 마구(harness), 대장간 도구들, 가축화된 동물과 식물들, 농사, 목축, 금속 세공입니다. 초기 문명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이러한 기술 뿐만 아니라, 행정기술에 의존했습니다. 이러한 기술 없이 문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기술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조만간 문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문명의 문제점은 기술의 문제점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술을 후퇴시키는 만큼, 문명 역시 후퇴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술 수준을 석기시대로 후퇴시킬 수 있다면, 문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폭력
카라: 폭력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저의 혐의에 대해 당신은 "폭력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물론, 폭력은 폭력입니다. 그리고 폭력 또한 자연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만약 포식자가 먹이감을 죽이지 않는다면, 먹이감의 개체수가 폭증해 주변의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워 환경을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많은 동물들은 같은 종을 상대로도 폭력적입니다. 예를들어, 야생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를 자주 죽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Time Magazine, August 19, 202, page 56) 어떤 지역에서는, 야생 곰들 간의 다툼이 빈번합니다. 잡지 Bear and Other Top Predators의 1권, 2장, 페이지 28–29에는 싸우다가 부상당한 곰의 사진이 실려있고, 그런 부상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갈색얼가니새(Brown Booby)는 둥지에 두 개의 알을 낳습니다. 알이 부화하고 나면, 한 새가 다른 새를 공격해 둥지 밖으로 떨어뜨려 죽입니다.(“Sibling Desperado,” Science News, Volume 163, February 15, 2003)
야생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폭력적입니다. Carleton S. Coon의 저서 "The Hunting People"(published by Little, Brown and Company, Boston and Toronto, 1971)는 수렵채집인들의 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수렵채집인 사회에서 사람 간의 폭력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쿤 교수는 페이지 XIX, 3, 4, 9, 10에서 자신이 수렵채집인들을 존경하며, 그들을 문명인들보다 훨씬 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직한 사람이기에, 현대인들이 불쾌하게 여길, 원시적인 삶의 폭력적 측면을 검열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폭력이 자연적인 인간 삶의 중대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폭력 그 자체로는 전혀 나쁠 것이 없습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폭력이 좋은지, 나쁜지는 그 폭력의 목적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왜 현대인들은 폭력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프로파간다에 의해 세뇌당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폭력을 두려워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프로파간다를 사용합니다. 기술-산업 체제는 체제의 질서정연한 기능을 해치지 않을 소심하고, 유순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전적으로 물리적인 힘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물론, 예외적으로, 체제 자신이 경찰, 군대를 통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괜찮다고) 가르침으로써, 체제는 물리력을 독점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스스로의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철학적, 도덕적 논리를 만들던 간에, 그 믿음의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무의식적으로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녹색 아나키즘
카라: 아나키스트, 녹색 아나키스트, 아나코 원시주의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들에게 동의하시나요? 채식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육식과 동물 사용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물/지구 해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arth First!, Earth Liberation Front, Gardening Guerillas와 같은 단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당신이 언급한 단체들은 하나의 운동에 속해있습니다.(편의상 녹색 아나키즘 운동이라고 부릅시다.) 물론, 문명과 기술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어느정도 옳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이 전개되는 형태 때문에, 이 운동은 사실 기술-산업 체제를 수호하고 혁명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반란을 직접적으로 억누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반란이 강제로 진압됐을 때, 훗날 권력자들이 통제하기 더욱 힘든 형태로 다시 발생합니다. 예를들어, 1878년 독일 제국의회는 사민주의 운동을 가혹하게 억압하는 법률들을 통과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민주의 운동은 박살났으며, 활동가들은 흩어지고, 당황하고,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이었습니다. 잠시 후 사민주의 운동은 다시 결성되었고, 더욱 활발해졌고, 아이디어를 전파할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냈고, 결과적으로 1884년쯤에는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습니다.(G. A. Zimmermann, Das Neunzehnte Jahrhundert: Geshichtlicher und kulturhistorischer Rückblick, Druck und Verlag von Geo. Brumder, Milwaukee, 1902, page 23)
따라서, 역사를 날카롭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반란을 무력을 통해 직접적으로 진압하려는 권력자들의 시도에는 한계가 있으며, 반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반란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반항적 충동을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해소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풍자 잡지 Krokodil은 권력자들에 대한 불만, 증오를 해소할 창구를 마련해줌으로서, 소비에트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 또는 진지한 저항을 막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민주적" 체제는 소비에트 연방에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효과적인 반란 해소법을 만들어냈습니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사람들이 실제로는 체제를 돕고 있으면서, 자신이 체제에 저항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좌파는 인종평등, 종교적 평등, 여성과 동성애자들을 위한 평등, 동물보호 등의 가치를 내세워 "저항"합니다. 하지만 이 가치들은 미국의 대중 매체들이 우리에게 매일같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좌파들은 언론 프로파간다에 의해 너무나 철저하게 세뇌된 나머지, 이러한 가치들만을 내세워 "저항"합니다. 그리고 이 가치들은 기술-산업 체제 그 자체의 가치 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체제는 좌파들의 반항적 충동을 체제에 해롭지 않은 방향으로 해소시키는데에 성공했습니다.
원시 사회
낭만화된 시각
기술과 문명을 상대로한 반란이야말로 현존하는 체제의 가치를 제대로 공격하는, 진정한 반란입니다. 그러나 녹색 아나키스트, 아나코 원시주의자 등(녹색 아나키즘 운동 전반)은 좌파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문명을 상대로한 반란의 많은 부분이 거세되었습니다. 그들은 문명의 가치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문명의 가치를 받아들여 문명화된 가치를 지닌 가상의 원시 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수렵채집인들이 하루에 두세시간(일주일에 14~21시간)만 일했고, 성평등했으며, 동물의 권리를 존중했으며, 환경을 파괴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전부 근거 없는 믿음입니다. 수렵채집인 사회들이 아직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절, 이들을 직접 관찰한 사람들이 쓴 글들을 읽어보면,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수렵채집사회들은 전부 어떤 형태로든 육식을 했습니다. 채식주의를 하는 사회는 없었습니다.
* 대부분의 수렵채집사회는 동물에게 잔인했습니다.
* 대부분의 수렵채집사회는 성평등하지 않았습니다.
* 하루에 2~3시간, 일주일에 14~21시간의 추정 노동 시간은, "일"에 대한 잘못된 정의에 기반합니다. 더 현실적인 추정에 의하면 수렵채집인들은 일주일에 최소 40시간 일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보다 훨씬 많이 일했습니다.
* 대부분의 수렵채집사회는 비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 대부분의 수렵채집사회에는 경쟁이 존재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의 경쟁은 폭력적인 형태를 띄기도 했습니다.
* 수렵채집사회들이 환경에 어느정도 피해를 끼쳤느냐는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일부는 환경을 대단히 잘 보전했지만, 다른 일부는 과잉 사냥, 지나친 불의 사용으로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전 위의 사실들을 증명하는 다수의 믿을만한 자료들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하면 이 편지는 지나치게 길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더 적절한 경우를 위해 이 정보들을 보류하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몇가지 사례만 언급하겠습니다.
동물 학대
음부티족 피그미:
"처음엔 한 명의 청년이 동물의 복부에 창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버둥거렸다.[...] 마이페가 또 하나의 창을 목에 찔러 넣었지만, 여전히 괴로워하며 저항했다. 세번째 창이 심장을 뚫고 나서야 저항을 멈추었다[...] 피그미들은 죽어가는 동물을 에워싸고, 그것을 찌르며 웃었다. 한번은, 피그미들이 새의 깃털을 산채로 불태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천천히 죽여야 고기가 더 부드럽다고 설명했다. 사냥개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태어날때부터 죽는 날까지 무자비하게 걷어차였다." Colin Turnbull, The Forest People, Simon and Schuster, 1962, page 101.
에스키모:
"Gontran de Poncins가 함께 지냈던 에스키모인들은 그들의 개를 난폭하게 때렸다. "Gontran de Poncins, Kabloona, Time-Life Books, Alexandria, Virginia, 1980, pages 29, 30, 49, 189, 196, 198–99, 212, 216.
시리오노족:
"시리오노족은 가끔씩 새끼 동물들을 산채로 잡아 야영지로 가져왔고, 어떠한 음식도 주지 않았다. 이들은 어린이들에게 학대당하다 얼마 안가 죽었다." Allan R. Holmberg, Nomads of the Long Bow: The Siriono of Eastern Bolivia, The Natural History Press, Garden City, New York, 1969, pages 69–70, 208. (시리오노족은 완전한 수렵채집인은 아니었습니다. 한 해의 특정 시기에는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으로 보냈습니다.Holmberg, pages 51, 63, 67, 76–77, 82–83, 265.)
성평등의 부재
음부티족 피그미:
턴불은 피그미족에 대해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고 서술했습니다. (Colin Turnbull, Wayward Servants, The Natural History Press, Garden City, New York, 1965, page 270) 그리고 "여성은 차별당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책에서, 턴불은 음부티족에게 현대적 의미의 성평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실들을 언급했습니다. "아내를 어느정도 때리는건 좋은 것으로 여겨졌고, 아내에게는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이 권장되었다."(Wayward Servants, page 287.)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만족하며, 아내를 때려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Forest People, page 205.) 남자는 아내를 바닥에 쓰러뜨려 손바닥으로 때린다.(Wayward Servants, page 211) 음부티족은 미국인들이 "데이트 강간"이라고 부르는 행동을 한다.(Wayward Servants, page 137.) 턴불은 남편이 아내에게 명령을 내린 두 사례를 언급했습니다.(Wayward Servants, page 288–89; Forest People, page 265.) 그의 저서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명령을 내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시리오노족:
시리오노족은 아내를 때리지 않았다.(Holmberg, page 128.) 하지만, "여성은 남편에게 순종적이었다."(Holmberg, page 125.) "대가족은 주로 가장 나이 많은 건강한 남성이 지배했다."(Page 129.) "여자들은[...] 남자들의 지배를 받는다.(Page 147.) "성관계는 주로 남자들이 주도했다.[...] 남녀가 단 둘이 숲에 있을 때, 남자는 말 한마디 없이 여자를 거칠게 눕혀 몸을 맛보았다."(Page 163.) 부모들은 분명히 남자 아이를 선호했다.(Page 202. pages 148, 156, 168–69, 210, 224.)
호주 원주민:
"호주 북서쪽으로 갈수록, 30세~50세의 남성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있었고,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을 통제했다."(Carleton S. Coon, The Hunting Peoples (cited earlier), page 255.) 일부 호주 원주민 부족들은, 젊은 여자를 나이 많은 남자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주로 남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거부한 여자들은, 받아들일 때까지 맞았다.(Aldo Massola, The Aborigines of South-Eastern Australia: As They Were, The Griffin Press, Adelaide, Australia, 1971. 참고. 정확한 페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70~80페이지에 있을 것입니다.)
노동시간
엘리자베스 캐시던의 저서에서 이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Elizabeth Cashdan, Hunters and Gatherers: Economic Behaviour in Bands, in Stuart Plattner (editor), Economic Anthropology,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9, pages 21–48.) 캐시던은 리처드 리의 연구결과를 인용했습니다. 리처드 리는 일부 쿵족 집단이 일주일에 40시간 정도 일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캐시던은 리처드 리가 쿵족이 한해 중 가장 적게 일할 때 연구했으며, 그들이 실제로는 훨씬 많이 일했을 것이라는 증거를 24, 25페이지에서 제시합니다. 그녀는 26페이지에서 리의 연구가 양육시간을 포함하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페이지 24~25에서 다른 수렵채집인들은 리가 연구했던 부족들보다 더 많은시간을 일했다고 말합니다. 일주일에 40시간은 아마 완전 수렵채집인들의 최소 노동시간인듯 합니다. Gontran de Poncins의 저서 Kabloona, 페이지 111에서는 그와 함께 살았던 에스키모족이 하루에 15시간 일했다고 말합니다. 아마 에스키모족이 매일 15시간 노동한다고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했던 에스키모족이 힘들게 일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물로 사냥하는 음부티족 피그미들에게 있어서, "그물짜기는 사실상 전업직업이나 다름없다.[...] 남녀 가릴것 없이 약간의 시간이라도 남으면 해야하는 일이었다." (Turnbull, Forest People, page 131.) 시리오노족 남자들은, 거의 매일같이 사냥했다.(Holmberg, pages 75–76.) 그들은 동틀무렵 떠나서 오후 4시~6시에 야영지로 돌아왔다.(Holmberg, pages 100–101.) 이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최소 11시간, 일주일에 3.5일, 일주일에 평균 최소 38시간 사냥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들은 사냥하지 않았을 때도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했으므로(pages 76, 100), 한해에 걸쳐 평균 일주일 노동시간은 40시간을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사실, 홈버그는 시리오노족이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사냥과 채집에 썼다고 추정합니다.(page 222) 이 추정에 따르면 일주일 56시간 노동입니다. 다른 형태의 일까지 포함하면, 일주일 노동시간은 60시간이 넘어갑니다. 시리오노족 여성은 "자신의 남편보다 더 많이 일했으며" 그리고 "자녀 양육 때문에 쉴 시간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Holmberg, page 224.) 시리오노족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페이지 87, 107, 157, 213, 220, 223, 246, 248–49, 254, 268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폭력
앞서 언급했듯이, 쿤의 저서 "The Hunting Peoples"에서 여러 개의 폭력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Gontran de Poncins의 저서 Kabloona에 따르면, (주로 등에 칼을 꽂는 방식의)살인이 그가 함께 살았던 에스키모족 사이에서 흔히 벌어졌다고 합니다. 음부티족 피그미는 아마 제가 아는 원시 부족들 중 가장 비폭력적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턴불의 저서에서는 (영아살해를 제외하면)단 한건의 살인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Wayward Servants, page 130)(영아살해에 대해서는, Schebesta, page 138 참고.) 하지만, 그의 저서 "The Forest People"과 "Wayward Servants"에서 턴불은 주먹이나 막대기를 이용한 싸움이 잦았음을 언급합니다. Paul Schebesta의 저서 "Die Bambuti-Pygäen"(Institute Royal Colonial Belge, Brussels, 1938, pages 81–84)는 19세기 초반에 음부티족이 그들의 숲에 마을을 짓고 사는 아프리카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경쟁
수렵채집인들 사이에 종종 벌어지는 싸움은 이들 사회에 경쟁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Coon, Hunting Peoples, pages 238, 252, 257–58) 만약 물리적 싸움을 경쟁으로 볼 수 없다면, 세상에 경쟁은 없습니다.
짝짓기 경쟁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지고는 했습니다. 예를들어, 턴불의 "Wayward Servants" 페이지 206을 보면, 남자를 두고 다른 여자와 싸우다가 치아 세개가 부러진 여자의 사례를 언급합니다. 쿤의 저서 페이지 260에서는 호주 원주민 남자들이 여자를 두고 싸웠음을 언급합니다. 식량을 두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고기를 나누는 문제를 두고 싸우는 경우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실, 이들은 사냥감을 들고 야영지로 돌아오고나서, 서로간에 소리높여 언쟁하고는 했다."(Turnbull, Wayward Servants, page 158.) 쿤은 에스키모족 사이에서 고래 고기를 어떻게 배분할 것이냐를 두고 "큰 소리로 언쟁"했음을 언급합니다.(Hunting Peoples, page 125. )
결론
저는 원시 인류가 성평등하고, 동물의 권리를 존중하고, 노동하지 않는 비경쟁적 친환경 채식주의자들이었다는 환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을 끝없이 나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는 이미 지나치게 길어졌고, 지금 제시된 사례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저는 수렵채집인들의 삶이 현대인의 삶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수렵채집인들을 연구했던 다수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찬양하고, 심지어 질투하기까지 했습니다. 예를들어, 캐시던은 페이지 21에서 수렵채집인들의 삶이야 말로 "대단히 성공적인" 삶이라고 평합니다. 쿤은 페이지 XIX에서, 수렵채집인들이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고 평했습니다. 턴불은 "Forest People" 페이지 26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음부티족은 숲에서 겪는 모든 고난, 역경, 비극을 멋진 환희와 행복으로 채우고, 낙천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낸 사람들이었다."
Schebesta는 페이지 73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러나 원시의 숲에서 사냥하는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모험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메마르고, 기계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숲속의 사람들이 얼마나 신비롭고 황홀한 삶을 살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페이지 205는 다음과 같습니다:
"피그미족은 전적으로 자연에 순응하고, 인간의 신체를 제대로 사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보기 드문 순수한 강인함과 활기,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쾌함과 낙천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연에 순응할줄 아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원시의 삶이 문명에서의 삶보다 나은 이유는 성평등, 동물친화성, 비경쟁성, 비폭력성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가치들은 현대 문명의 부드러운 가치들입니다. 그러한 가치들을 수렵채집사회에 반영함으로써, 녹색 아나키즘 운동은 현실에 존재한적 없는 가상의 원시 유토피아를 만들어냈습니다.
녹색 아나키즘과 혁명
따라서, 녹색 아나키즘 운동은 문명과 근대성을 거부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들의 노예로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녹색 아나키즘 운동은 효과적인 혁명 운동이 될 수 없습니다.
첫째, 현대 기술과 문명을 제거하는 진정한 혁명에 쓰였어야 했던 녹색 아나키즘 운동의 힘 일부는 인종차별, 성차별, 동물 권리, 동성애 권리 등 유사 혁명으로 인해 낭비되었습니다.
둘째, 이러한 유사 혁명에 헌신함으로 인해, 녹색 아나키즘은 너무 많은 좌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현대 문명을 제거하는 것보다 인종차별, 성차별 등 좌파 이슈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로인해 기술과 문명 문제에 투자해야했던 힘을 더욱 많이 낭비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여성, 동성애자, 동물 등의 권리보장은, 문명의 제거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에서 여성과 동성애자들은 대체로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원시사회는 대체로 동물에게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대 문명을 지지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넷째, 녹색 아나키즘 운동은 부드러운 원시 유토피아 환상 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의 부드러운 가치들을 채택하는 바람에 나약하고, 공상적이고, 게으르고, 행동력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끌어모았습니다. 이들은 기술-산업 체제를 제거하는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행동을 하기보다는 유토피아 판타지에 안주합니다.
사실, 녹색 아나키즘 운동이 자칫 기독교의 전철을 밟을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이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개인의 리더십을 따르던 원래의 기독교는, 종교적인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성공했지만, 혁명 운동으로서의 기독교는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타협하는 바람에, 기독교는 당대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로마 제국 권력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녹색 아나키즘 운동과 초기 기독교에는 불길한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두 운동의 서사는 대단히 유사합니다:
원시 유토피아 = 에덴 동산
문명의 탄생 = 타락, 원죄, 선악과
혁명 = 심판의 날
원시 유토피아로의 복귀 =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
채식주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 존재하는 안식일과 비슷한 심리적 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벌목 장비를 몸으로 가로막는 활동가들은 순교한 초기 기독교인들과 유사합니다.(물론 기독교인들의 순교는 현대 활동가들의 그것보다 훨씬 용감한 것이었죠.) 녹색 아나키즘 운동이 기독교와 같은 길을 걷는다면, 이 운동 역시 혁명에 실패할 것입니다.
녹색 아나키즘 운동은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할 수 있습니다. 녹색 아나키즘이 효과적인 혁명 운동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기술과 문명에 반대하는 것이 녹색 아나키즘의 주요 의제이기 때문에, 기술 문명에 위협을 느끼는 청년들은 녹색 아나키즘에 이끌릴 것입니다. 분명히 이들 전부가 좌파 또는 나약하고, 공상적이고, 행동력 없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진정한 혁명가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색 아나키즘 운동에서 그들은 좌파들과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압도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거세당하고, 부패하게 되고, 그들의 혁명적 잠재력은 낭비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녹색 아나키즘 운동은 잠재적 혁명가들을 파괴하는 기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녹색 아나키즘과 문명의 부드러운 가치로부터 확실하게 분리된 새로운 혁명 운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 성평등, 동물의 권리, 동성애 포용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가치들은 기술 문명의 제거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가치들은 혁명적 가치가 아닙니다. 효과적인 혁명 운동은 원시사회의 강한 가치들을, 예를 들어 유능함, 인내심, 정직함, 신체-정신적 강인함, 강요된 통제에 대한 불관용, 통증을 견뎌내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추신: 저에게 보내진 편지들은 가끔 도착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편지를 보냈는데도 답장이 안온다면, 제가 그 편지를 못받은 겁니다.
진심을 담아,
테드 카진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