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 주: 이 글은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저서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번역문은 온전히 제가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한국어 번역문은, 오타, 오역이 심했습니다. 오타, 오역들을 교정하고, 부자연스러운 번역체 문장들을 자연스럽게 수정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부분들은 직접 새롭게 번역했습니다. 여전히 오타, 오역과 부자연스러운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남아있을테니 양해부탁드립니다. 이 주소의 번역문을 참고했습니다. poolsoop.com/entry/Unabomber-%EC%84%A0%EC%96%B8%EB%AC%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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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narchistlibrary.org/library/fc-industrial-society-and-its-future#toc13
서문
1. 산업혁명과 그 결과는 인류에게 재앙이었다. 산업혁명 덕분에 “선진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는 불안정해졌고, 삶은 무의미해졌으며, 인간은 비천한 존재로 전락했다. (제3세계의 경우에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심리적 고통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 자연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 앞으로 기술이 계속 발전할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아예 사라져 버릴 것이고, 자연은 더욱 극심하게 파괴될 것이다. 또한 추측컨대 사회적 혼란과 심리적 고통도 훨씬 더 극심해질 것이며, “선진국”에서도 역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2. 이 산업-기술 체제는 살아남을 수도 있고 붕괴될 수도 있다. 이 체제가 살아남을 경우, 어쩌면 마침내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낮은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길고 몹시 고통스러운 적응기를 거친 후의 일일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인류와 수많은 생물들은 기계적 생산품 또는 사회라는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존재로 격하되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이 체제가 살아남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체제를 개혁 또는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이 박탈당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3. 이 체제가 붕괴될 경우에도 그 결과는 여전히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체제가 거대해질수록 그 붕괴로 인한 결과도 더욱 참혹해진다. 그러니 이 체제가 어차피 붕괴될 것이라면, 그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4.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산업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을 주장한다. 이 혁명에선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혁명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고,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산업 체제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의 길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을 아주 대략적인 수준에서 제시할 수는 있다. 이 혁명은 결코 정치적 혁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혁명의 목표는 정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 사회의 경제적, 기술적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5. 이 글에서 우리는 산업기술사회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측면들의 일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것이다. 다른 측면들은 간단히 언급만 하거나 아니면 전부 생략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측면들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논의의 범위를 공공의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분이나, 아니면 새롭게 논의되어지는 부분으로 한정시켜야한다. 예를 들면, 이미 잘 조직된 환경보호 운동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 야생자연의 파괴에 대해서는 거의 논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현대 좌파의 심리
6.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 세계가 품고 있는 광기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드러난 광기가 바로 좌파 이념(leftism)이다. 좌파의 심리를 먼저 검토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지닌 문제를 개괄하는데 그것이 길잡이 역할을 해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 그런데 좌파란 무엇인가? 20세기 전반에 좌파는 보통 사회주의로 여겨졌다. 오늘날의 좌파는 분산되어 있어 누굴 좌파라 해야할지 분명하지 않다. 우리가 좌파라고 할 때는 보통 사회주의자, 집단주의자,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스트, 동성애자와 장애인 권리 운동가, 동물보호 운동가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런 운동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좌파가 되는건 아니다. 우리가 좌파에 대해서 논할 때는 운동이나 이념, 또는 연관된 집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좌파"가 무엇인지는 좌파의 심리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문단 227~230을 참고할 것.)
8. 그래도 여전히 좌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아주 모호한 상태로 남게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어떤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우리가 여기서 시도할 수 있는 일은, 현대 좌파를 이끌어 가는 주된 원동력이라고 생각되는 두 가지 심리적 경향을 대강이나마 밝혀내는 정도다. 물론 우리가 좌파의 심리에 관한 모든 진실을 밝혀 낼 수는 없다. 또한 우리의 논의는 오로지 현대 좌파에만 국한된다. 19세기와 20세기 초기 좌파에 까지 우리의 논의가 적용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9. 현대 좌파의 저변에 깔려있는 두 가지 심리는 '열등감(feelings of inferiority)'과 '과잉 사회화(oversocialization)'이다. 열등감은 현대 좌파 전반에 깔려있는 특성인 반면, 과잉 사회화는 일부의 특성이다. 하지만 그 일부는 대단히 영향력 있다.
열등감
10. 우리가 '열등감'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열등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하, 무력감, 비관주의, 패배주의, 죄책감, 자기 혐오 등과 같이 열등감과 관계 있는 모든 속성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현대의 좌파들은(억압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감정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감정들이 현대 좌파의 방향을 결정한다.
11. 누군가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칭하는 거의 모든 단어를 비하적 표현으로 여긴다면, 우린 그 사람이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다고 본다. 이 경향은 (본인이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소수자 집단에 포함되있던 아니던 간에)소수자 권리 운동가들 사이에 만연하다. 그들은 소수자를 지칭하는 단어에 대단히 민감하다. 아프리카인, 동양인, 장애인, 여성을 뜻하던 "흑인종(Negro)", "동방인(Oriental)", "장애자(Handicapped)", "계집(Chick)"이라는 단어에는 원래 비하적 의미가 없었다. '계집'이라는 단어는 그저 남성의 '사내'에 해당하는 여성형 단어였을 뿐이다. 이런 표현에 비하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운동가 그 자신들이다. 어떤 동물 보호 운동가들은 지나치게 멀리간 나머지 "애완동물(pet)"이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반려동물(animal companion)"을 대신 써야한다고 주장한다. 좌성향 인류학자들은 원시인들이 부정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원시(primitive)"를 "비문자(nonliterate)"로 교체하려고 한다. 그들은 원시문화가 자칫 우리의 문화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질까봐 편집증적 행태를 보인다.(우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정말로 원시문화가 열등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린 그저 좌성향 인류학자들이 얼마나 예민한지 지적했을 뿐이다.)
12.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흑인 빈민, 동양인 이민자, 학대당한 여성, 장애인들이 아니라 활동가들이다. 이 활동가들은 대부분 그들이 '억압당했다'고 주장하는 집단에 속해있지도 않다. 이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사회적 특권층에 속해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안정된 직장과 충분한 월급이 보장된 대학교수, 그 중에서도 백인-이성애자-남성-중상류층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13. 많은 좌파들은 약하고(여성), 패배했고(아메리카 원주민), 미움당한(동성애자) 이미지를 갖고 있는 집단에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좌파들 스스로가 이 집단들이 열등하다고 느낀다. 좌파 스스로는 절대 자신들이 그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테지만, 분명히 이런 집단을 열등하다고 보고 있기에 자신의 문제점을 이런 집단에 투영하는 것이다.(우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정말로 여성, 인디언들이 열등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린 그저 좌파들의 심리상태를 지적했을 뿐이다.)
14. 페미니스트들은 온 힘을 다해 여성이 남성만큼이나 강하고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분명, 그들은 어쩌면 정말로 여성이 남성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있다.
15. 좌파들은 강하고, 좋고, 성공한 이미지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증오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고, 서구 문명을 증오하고, 백인 남성을 증오하고, 합리성을 증오한다. 좌파들이 말하는 자신들이 서구와 그에 비롯된 것들을 증오하는 이유와, 그들이 실제로 그것을 증오하는 동기는 분명히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구가 호전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고, 자국민 중심적이기 때문에 서구를 증오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나 원시 문화권에서 똑같은 결함이 나타날 경우, 좌파는 그들을 위한 변명거리를 찾아내고, 기껏해야 그런 결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할 뿐이다. 서구 문명에서 그런 결함이 보일 때는 열광적으로 (때로는 엄청나게 과장하며)지적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좌파가 미국과 서구를 증오하는 진짜 동기는 그 같은 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좌파가 미국과 서구를 증오하는 이유는, 바로 미국과 서구가 강하고 성공했기 때문이다.
16. '자신감', '독립성', '자주성', '진취성', '낙관주의' 등의 단어들은 진보주의자, 좌파의 사전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좌파는 반-개인적이고, 친-집단적이다. 좌파는 사회가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 주고, 모든 사람들을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며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채울 수 있다는, 내적 자신감이 없는 인간이다. 좌파가 경쟁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그가 마음 속 깊이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17.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예술 작품들은 흔히 더러움, 패배, 절망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는, 합리적 계산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며,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순간적인 감각에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뿐이라는 식으로, 이성적 통제의 가능성을 아예 포기하고 온통 미친 짓거리로 가득 찬 난장판만을 보여줄 뿐이다.
18. 현대의 좌파 철학자들은 이성, 과학,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문화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누구나 과학적 지식의 토대에 대해, 그리고 객관적 현실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고 진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좌파 철학자들이 지식의 토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냉철한 논리학자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리와 현실을 공격할 때, 그들은 감정적으로 심한 흥분 상태에 빠져 있다. 그들이 이 개념들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들의 심리적 욕구 때문이다. 그들의 공격은 그들이 지닌 적개심의 표출이며, 공격이 성공할 때 그들의 권력욕도 충족된다. 더욱이 좌파들은 과학과 합리성을 증오한다. 과학과 합리성에 의해 참된 신념들(즉 성공한 것, 우월한 것)과 거짓 신념(즉 실패한 것, 열등한 것)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좌파의 열등감은 점점 깊어져 어떤 것을 성공한 것이나 우월한 것으로, 그리고 나머지를 실패한 것이나 열등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게 된다. 많은 좌파들이 정신질환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IQ측정의 유용성을 거부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심리가 깔려 있다. 좌파들은 인간의 능력, 행동을 유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그런 설명이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좌파들은 개인의 유능함이나 무능함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설명을 선호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열등'하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다. 사회가 그를 올바르게 양육하지 않은 것이다.
19. 좌파는 열등감 때문에 거만을 떨거나, 이기주의자가 되거나, 잘난척하거나, 깡패, 무자비한 경쟁자가 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나약함을 알고, 자부심도 약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강자가 될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강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그런 불쾌한 행동들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좌파는 거기에서 한참을 더 나간다. 그의 열등감은 너무나 깊어서 그는 스스로가 강하고 가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여기서 좌파의 집단주의가 생겨난다. 그는 자신을 동일화시킬 수 있는 거대 조직, 또는 대규모 사회 운동의 일원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다.
20. 좌파의 전략이 지닌 피학(被虐)적 성향에 주목하라. 좌파들은 자동차 앞에 누워서 저항하는가 하면, 경찰이나 인종주의자들을 일부러 자극해 자신들을 학대하도록 유도한다. 가끔씩 그런 전략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좌파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이 '좋아서' 그런 피학적 전략을 사용한다. 자기혐오는 좌파의 특징이다.
21. 좌파들은 자신들의 운동이 동정심 또는 윤리적 원칙이라는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과잉 사회화된 좌파의 운동에서 윤리적 원칙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정심과 윤리적 원칙은 결코 좌파 운동의 주된 동기가 아니다. 좌파의 행동에서는 호전성이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난다. 권력에 대한 욕망 역시 그렇다. 게다가 좌파의 행동 상당 부분은, 좌파들이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산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흑인들을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가 흑인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호전적이고 교조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며 요구하는게 적절한가? 적극적 우대조치를 얻어내려면, 적극적 우대조치가 자신들을 차별한다고 여기는 백인들로부터 그저 빈말로라도, 또 상징적으로나마 양보를 얻어낼 수 있도록 조금 더 외교적이고 타협적인 접근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좌파 활동가들은 그런 접근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그런 접근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흑인을 돕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종 문제는 좌파가 자신들의 적대감과 좌절된 권력 욕구를 표출하기 위한 좋은 핑계거리다. 그렇게 좌파는 오히려 흑인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활동가들이 다수 백인에게 보이는 적대적 태도로 인해 인종 간의 증오가 증폭되기 때문이다.
22. 만일 우리 사회에 문제가 없다면, 좌파들은 분쟁을 일으킬 핑계를 얻기 위해 문제들을 발명해 낼 것이다.
23. 강조하지만, 앞에서 한 설명은 결코 좌파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다만 좌파의 일반적 성향이 그렇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지적했을 뿐이다.
과잉 사회화
24. 심리학자들은 '사회화'라는 단어를 어린이들이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말하고 생각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 누군가가 사회의 도덕률을 잘 따르고 사회의 일부로서 적절히 기능할 때, 그가 잘 사회화되었다고 한다. 보통 좌파들은 반항아로 여겨지기에, 많은 좌파들이 과잉 사회화되었다고 말하는건 언뜻 보기에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충분히 근거있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좌파들은 반항아가 아니다.
25. 우리 사회의 도덕률은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기에, 거의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도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활동할 수 없다. 예를들어, 사회는 우리에게 누군가를 미워해선 안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당사자가 그걸 인정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누군가를 미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심하게 사회화되어 있어,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심각한 짐이 된다.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동기를 속여야하며, 자신의 비도덕적 동기에서 비롯된 감정이나 행동을 도덕적인 것으로 포장하기 위한 핑계를 찾는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과잉 사회화 되었다"고 말한다.
26. 과잉 사회화는 자기비하, 무력감, 패배주의, 죄책감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사회화할 때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어린이가 사회의 기대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보일 때 창피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칠 경우, 또는 어떤 어린이가 수치심에 유난히 예민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경우, 그 어린이는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하게 된다. 게다가 과잉 사회화된 사람은 항상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가볍게 사회화된 사람들보다 훨씬 심한 제약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된 행동을 밥먹듯이 저지른다. 거짓말, 좀도둑질, 교통법규 위반, 근무 태만, 타인에 대한 증오, 악담, 남을 앞지르기위한 교묘한 속임수... 과잉 사회화된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설령 어쩌다 그런 행동을 저지른다 해도, 이번엔 스스로 만들어 낸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과잉 사회화된 사람은 기존의 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현실에서가 아니라, 단지 생각과 감정으로 경험하는 경우에조차 죄책감에 빠진다. 그는 “더러운”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가 사회화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갖가지 비윤리적인 행동들에 대해서도 순응하도록 사회화된다. 결국 과잉 사회화된 사람은 끝까지 윤리라는 심리적 쇠사슬을 벗어날 수 없으며, 사회가 그에게 제시한 윤리적 삶을 따라 평생을 지낸다. 과잉 사회화된 사람들 대부분은 그 결과, 구속감과 무력감이라는 심각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과잉 사회화야 말로 인간이 타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그 어떤 잔혹 행위보다도 무서운 잔혹 행위라고 생각한다.
27. 현대 좌파 내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큰 영향력을 지닌 한 분파가 과잉 사회화되어 있으며, 그들의 과잉 사회화에 의해 현대 좌파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과잉 사회화된 좌파들은 흔히 지식인 또는 중상류층 출신들이다. 대학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도로 사회화된 분파를 구성함과 아울러 대부분의 좌익세력을 이루고 있음을 주목하라.
28. 과잉 사회화된 좌파는 자신의 심리적 구속감을 벗어 던지려 애쓰며, 저항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을 내세우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에 저항할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현대 좌파의 목표는 기존 윤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좌파는 기존의 윤리적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다음, 주류 사회가 그 원칙을 위반한다고 비난한다. 인종 평등, 성 평등,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 전쟁반대, 비폭력 운동, 언론의 자유, 동물에 대한 사랑 등이 그런 윤리적 원칙들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칙으로는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하는 개인의 의무와, 개인을 보호해야하는 사회의 의무도 있다. 이 모든 원칙들은 우리 사회에서(아니면 적어도 중상류층 사이에서) 오랫동안 깊게 뿌리내려 온 가치들이다. 주류 언론과 교육 시스템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자료들 대부분에는 그런 가치들이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거나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좌파, 특히 과잉 사회화된 좌파들은 그 원칙들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대신에 사회가 그 원칙들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적대감을 정당화한다.
29. 과잉 사회화된 좌파들이 실제로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가치를 따르면서도, 마치 사회에 저항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사례를 보이겠다. 많은 좌파들이 흑인들이 좋은 직업을 주고, 흑인들의 교육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하도록 하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을 요구한다. 그렇게 흑인들이 좌파들 스스로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하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고 말이다. 좌파들은 흑인들을 체제의 일부로 만들고자 한다. 흑인들을 마치 중상류층 백인처럼 기업가, 변호사, 과학자로 만들려고한다. 여기에 좌파들은 자신들은 결코 흑인을 백인의 복사본으로 만들려고 하는게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 증거로 자신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를 보존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를 보존한다는게 무엇인가? 그저 흑인들의 음식, 흑인들의 음악, 흑인들의 패션, 흑인들의 교회와 모스크를 보존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흑인 문화의 보존이란건 결국 이렇게 피상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중요한 측면에서 봤을 때, 과잉 사회화된 좌파들은 흑인들이 백인들의 이상향에 복종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좌파들은 흑인이 이공계 과목을 전공하고, 기업의 오너 또는 과학자가 되어, 평생을 계층 사다리를 올라 흑인들도 백인만큼이나 뛰어나다는것을 증명하길 원한다. 좌파들은 흑인 아버지가 "책임감 있고", 흑인 깡패들이 비폭력적으로 변하길 원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정확히 산업-기술 체제가 원하는 가치이다. 이 체제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업을 갖고, 계층 사다리를 오르고,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음악을 듣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종교를 갖든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상, 과잉 사회화된 좌파들은 그들이 얼마나 부정하던, 결국엔 흑인들을 체제에 통합시키고 체제의 가치에 복종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30. 우리는 과잉 사회화된 좌파를 포함해서, 좌파들이 우리 사회의 근본적 가치들에 대해 절대로 저항하지 않는다고는 주장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그들도 때로는 저항한다. 일부 과잉 사회화된 좌파는 심지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칙들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에게 있어 폭력은 '해방'의 한 형태다. 다시 말하자면, 폭력을 저지름으로써 자신들에게 내재화된 심리적 구속을 깨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잉 사회화된 탓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훤씬 심한 심리적 구속에 얽매여 있다. 이 지점에서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그들의 욕구가 생겨난다. 그런데 좌파들은 흔히 주류 가치를 담고 있는 용어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저항을 정당화한다. 가령 폭력을 행사할 경우, 그들은 인종차별 같은 것들에 저항해 싸우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1. 우리는 엉성한 스케치 수준에 불과한 좌파의 심리에 관한 우리의 설명에 반론의 여지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제의 상황은 매우 복합적이며,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설령 필요한 자료를 다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몇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현대 좌파의 심리 안에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성향이 자리잡고 있음을 극히 대략적이나마 지적하려 했을 뿐이다.
32. 좌파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낮은 자존감, 비관적, 패배적 성향은 은 좌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좌파에게서 유난히 눈에 띈다는 것뿐이지, 이런 성향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 어느 사회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우리를 사회화시키려 한다. 심지어 사회는 무얼 먹을지, 어떻게 운동할지, 어떻게 연애할지, 어떻게 자녀를 키울지에 대해서까지 전문가들을 통해 지시하려 든다.
권력 과정
33. 인간은 우리가 앞으로 '권력 과정'이라 부르는 어떤 것에 대한 (아마 생물학적인)욕구를 갖고 있다. 이 욕구는 (널리 알려진 대로)권력에의 욕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 동일한 욕구는 아니다. 권력 과정은 네 개의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세 구성 요소를 우리는 목표, 노력, 목표 달성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에겐 노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필요하다. 목표를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달성해야 한다.) 네 번째 요소는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고,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율성이라고 부르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거론할 것이다.(문단 42~44)
34.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심각한 심리적 문제들을 키워가게 될 것이다. 처음에야 모든 것이 신나겠지만, 그것도 잠깐, 그는 급속히 권태에 빠지고 타락해 간다. 그러다 마침내는 병적인 우울증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역사는 유한(有閑) 귀족들이 대체로 퇴폐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전투적 귀족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안정된 유한 귀족들은 권력을 쥐고 있어도 보통 권태에 빠지고, 쾌락에 탐닉하다가 결국 타락해 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권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겐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목표가 필수적인 것이다.
35. 누구에게나 목표가 있다. 다른 목표가 전혀 없다 해도, 음식과 물, 그리고 기후에 따라 필요한 옷과 주거지 등 생필품을 구한다는 목표는 남아 있다. 그런데 유한 귀족은 이런 것들을 아무런 노력없이 획득한다. 여기에서 그의 권태와 타락이 생겨난다.
36.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만약 그 목표에 목숨이 걸려있다면 그 실패의 결과는 죽음이다. 목숨과 상관없는 목표라면 그 결과는 좌절이다. 평생을 계속해서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패배주의, 자기 비하,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37. 따라서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인간에게는 노력을 쏟아 달성할 수 있는 목표들이 필요하며, 그 목표들을 납득 가능한 비율로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대리 활동
38. 하지만 모든 유한 귀족이 권태에 빠지고 타락하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퇴폐적인 쾌락에 빠지는 대신, 해양생물학 연구에 전념했고 그 분야에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신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내던질 필요가 없을 때, 사람들은 흔히 인위적 목표를 세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했던 것과 똑같은 에너지를 쏟아 가며, 자신의 전부를 바쳐 목표 달성을 추구한다. 그런 식으로 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문학에 열정을 쏟았고, 몇 세기 전의 유럽 귀족들은 고기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었음에도 사냥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 것이다. 어떤 귀족들은 정교한 방식으로 부를 과시함으로써 신분 경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히로히토 같은 소수의 귀족들은 과학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39. 우리가 '대리 활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단순히 어떤 목표를 갖기 위해, 또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충족감'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 목표를 지향하는 활동을 뜻한다. 어떤 활동이 대리 활동인지 알아보는 간단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X’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는 사람이 있다고 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자. 만약 그 사람이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바쳐야만 했다면, 그리고 그런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여러 가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방법으로 활용했다면, 목표 X를 달성하는데 실패했을 때 그가 심각한 박탈감을 느끼겠는가? 만약 대답이 ‘아니오’라면, 그 때 목표 X를 추구하는 것은 대리 활동이 된다. 히로히토의 해양생물학 연구는 분명히 하나의 대리 활동이 된다. 히로히토가 생필품을 얻기 위해 과학과 무관한 일에 모든 시간을 바쳤다 해도, 그가 그 일에서 재미를 느꼈다면, 그는 자신이 해양생물의 해부학과 습성을 모른다는 이유로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반면에 (예를 들어) 섹스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대리 활동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과의 성적 관계를 전혀 가지지 않고 평생을 보내야 한다면, 설령 그 문제만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해도, 여전히 박탈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과도하게 섹스를 추구하는 것은 역시 대리 활동이 될 수 있다.)
40. 현대 산업사회에서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최소한의 노력만 있으면 된다. 간단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훈련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충분하며, 직업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면 그저 제 시간에 출근하고 적당히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적당한 지능,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순한 복종이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살펴 준다. (물론 생필품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최하층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주류 사회이다.) 그러니 현대 사회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으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과학적 연구작업, 스포츠 기록 경쟁, 인도주의 활동, 예술 및 문학 창작, 회사 내에서의 직위 상승, 신체적 필요를 한참 넘어서는 돈과 물질적 재화의 획득, 그리고 비백인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하는 백인 활동가처럼 활동가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슈를 떠들어대는 사회 운동이 포함된다. 이런 활동들이 언제나 순수한 대리 활동으로 머물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단순히 추구해야 할 목표가 필요하다는 욕구 이외의 다른 욕구들이 활동의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과학 연구는 부분적으로 특권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유발될 수도 있고, 예술 창작은 감정을 표현하려는 욕구에 의해서, 민병대 운동은 적대감에 의해서 유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활동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활동의 상당 부분은 대리 만족을 위한 활동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아마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 얻는 '만족감'이 돈이나 특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41.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대리 활동은 진짜 목표(즉,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가 이미 채워졌을 경우에도 여전히 달성하기를 원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만족감이 떨어진다. 이는 대리 활동에 깊이 몰두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만족할줄 모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돈에 눈이 먼 사람은 끝없이 더 많은 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곧바로 다음 문제로 달려간다. 장거리 달리기 선수는 언제나 보다 멀리, 보다 빨리 달리기 위해 자신을 몰아친다. 대리 활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지루한” 활동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만족감을 그런 활동에서 얻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사회가 생물학적 욕구를 채우는 데 필요한 노력을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를 자율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 대신 거대한 사회적 기계의 부품으로서 기능함으로써 만족시킨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의 대리 활동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엄청난 자율권을 누리고 있다.
자율성
42. 권력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율성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표를 향해 노력할 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율성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노력은 스스로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스스로 정한 방향과 통제를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이 같은 주도권과 방향 결정권, 통제권을 반드시 행사해야 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작은 집단의 구성원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만약 여섯 명의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서로의 노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다면,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일체의 자율적인 결정권과 주도권을 허용치 않는 엄격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일한다면, 그들이 지닌 권력 과정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집단적인 결정 방식을 채택할 경우에 그 집단이 너무 커서 각 개인의 역할이 무의미해지는 집단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43. 어떤 개인들은 자율성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어 보이기도 한다. 권력욕이 원래 약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속한 강력한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권력욕을 충족시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오직 물리적인 권력에만 만족하는 거의 짐승 수준의 바보들도 있다.(뛰어난 군인이 그 사례다. 그는 상관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서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44.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표를 설정하고, 자율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목표를 달성하는 권력 과정을 통해서 자존심과 자신감, 권력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얻게된다. 어떤 사람이 이 권력 과정에 참여할 정당한 기회를 갖지 못했을 때, 그 결과는 (개인에 따라, 그리고 권력 과정이 붕괴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지만) 권태, 타락, 자기 비하, 열등감, 패배주의, 절망, 불안, 죄책감, 좌절, 적대감, 배우자 또는 자녀 학대, 탐욕스러운 쾌락주의, 변태성욕, 불면증, 과식 또는 거식증 등으로 나타난다.
사회 문제들의 근원
45. 앞에 열거한 증상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이런 증상들이 대규모로 만연해 있다. 오늘날 세상이 점점 미쳐가고 있음을 지적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원시 인류가 스트레스와 좌절로 인한 고통을 적게 겪었으며, 현대인보다 자신의 인생에 더 만족했으리라고 믿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물론 원시 사회라고 해서 모든 것이 편안하고 쾌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주 원주민 사이에서는 여성학대가 흔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일부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에서는 성 전환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앞 문단에서 열거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은 분명 현대 사회에서처럼 흔하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46. 현대 사회의 사회적, 심리적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가 지금까지 인류가 진화해 왔던 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또 과거 환경에서 살면서 발전시켜 온 행동 양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현대 사회가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온갖 비정상적인 환경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권력 과정에 제대로 참여할 기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것만이 사회 문제의 유일한 근원은 물론 아니다. 사회 문제의 한 근원으로서의 권력 과정 붕괴를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몇 가지 다른 근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47. 현대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비정상적 환경으로는 과도한 인구 밀도,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 지나치게 빠른 사회 변화, 대가족이나 마을, 부족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소규모 공동체의 붕괴 등을 들 수 있다.
48. 인구 과밀이 스트레스와 공격성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인구 과밀과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는 기술 발전의 결과로 빚어진 현상이다. 산업화 이전의 대부분의 사회는 농경 사회였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으며, 도시에 사는 인구 역시 엄청나게 늘어났다. 한편 현대적 농업 기술 덕분에 지구는 이제껏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과밀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되었다. (또한 기술로 인해 인구 과밀의 부정적 효과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는 기술이 사람들의 손에 더욱 더 강한 파괴력을 쥐어 주었기 때문이다. 전동 잔디깎이, 라디오, 오토바이 등등 저 수많은 종류의 소음 발생 장치들을 생각해 보라. 만일 이런 기계들을 규제하지 않는다면, 평화와 고요를 바라는 사람들은 소음으로 인해 좌절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면 기계들을 규제한다면, 이번에는 기계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규제로 인해 좌절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기계들이 애초에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갈등도 좌절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9. 원시 사회에는 (아주 서서히 변화할 뿐인) 자연이 안정적인 기준을 제공해 주었고, 사람들은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반대로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 사회가 자연을 지배하고 있으며, 기술의 변화에 따라 현대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안정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50. 보수주의자들은 바보다. 그들은 전통적 가치들이 망가지고 있다고 불평하면서도, 기술의 발전과 경제 성장을 열광적으로 지지한다. 한 사회의 기술과 경제의 급격한 변화는 사회의 다른 측면들의 급격한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런 급격한 변화가 필연적으로 전통적 가치들을 붕괴시킨다는 자명한 사실을 보수주의자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51. 전통적 가치의 붕괴는 전통적인 소규모 사회 집단을 묶어 주고 있는 유대 관계가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현대의 환경이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가도록 요구하거나 유혹한다는 점도 소규모 사회 집단의 와해를 촉진한다. 그런 이유를 제쳐놓더라도, 우선 기술 사회가 효율적으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족 간의 유대와 지역 공동체를 약화시켜야만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체제에 최우선으로 충성해야 하며,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충성은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소규모 공동체의 내부적 충성도가 체제에 대한 충성도보다 더 강력할 경우, 그 공동체는 체제를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52.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 임원이 어떤 자리에 능력있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사촌이나 친구, 같은 종교의 신도를 앉힌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체제에 대한 충성보다 사적인 충성을 우선시한 것이고, 이는 곧 '족벌주의' 또는 '차별'이 되는데, 둘 다 현대 사회에서는 끔찍한 범죄 행위다. 사적 또는 지역적 충성을 체제의 충성에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채 산업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는 대부분 몹시 비효율적이다(라틴 아메리카를 보라.). 따라서 선진 산업사회는 오로지 거세되고, 길들여진, 그리고 체제의 도구가 되어버린 소규모 공동체들만을 허용할 수 있다.
53. 인구 과밀, 급격한 사회 변화와 공동체의 붕괴는 그 동안 사회 문제의 근원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만으로는 오늘날 볼 수 있는 광범위한 사회 문제를 설명하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54. 산업화 이전의 도시들 중 몇몇 도시는 매우 큰 규모와 높은 인구 밀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도시의 주민들이 현대인들처럼 심리적 문제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에도 미국에는 여전히 인구 밀도가 낮은 농촌들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그런 농촌들에서도 도시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문제들을 발견한다. 물론 농촌 지역에서는 문제들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차이는 있다. 그러니 인구 과밀이 사회 문제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55. 미국 개척자들이 서부로 나아가던 19세기, 당시에도 인구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대가족과 소규모 사회 집단은 붕괴되었다. 그 붕괴의 정도는 오늘날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사실, 수 마일에 걸쳐 이웃이 전혀 없으니 도저히 공동체에 소속될 방법이 없는 고립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핵가족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척민들이 공동체의 붕괴 때문에 사회 문제들을 겪었던 것 같지는 않다.
56. 아울러 미국 개척자 사회에서의 사회 변화는 매우 빠르고 심오하게 이루어졌다. 법률과 질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상황에서, 통나무집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야생 동물의 고기를 주식으로 먹으며 성장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다가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하게 되고, 법률적 제재가 효력을 발휘하는 질서 잡힌 공동체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사회 변화는 전형적인 현대인의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변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회 변화가 사람들에게 심리적 문제들을 일으켰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여 19세기 미국 사회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낙관적이고 자신만만한 분위기가 펴져 있었다.
57. 우리가 볼 때 두 사회가 다른 점은, 19세기의 개척자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냈다고 느낀 반면(이는 상당히 정당한 논리다.), 현대인은 변화가 자신에게 강요되었다고 느낀다는(이 역시 상당히 정당한 논리다.)점이다. 개척자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땅에 정착해 자신의 노력을 통해 그 땅을 농장으로 만들어냈다. 그 시절의 어느 군(County)에는 군을 통틀어 고작 수백 명의 거주자만이 있었고, 현대의 군보다 훨씬 더 고립되고 자율적인 집단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개척자는 비교적 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질서 잡힌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공동체의 창조를 과연 진보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개척자는 그런 공동체 창조 작업을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58. 급격한 사회 변화와 공동체의 친밀한 유대 관계의 상실을 겪으면서도 현대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광범위한 이상 행동을 발생시키지 않는 사회는 그 밖에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 권력 과정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통과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현대 사회의 사회적, 심리적 문제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만 권력 과정이 붕괴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문명 사회에서 권력 과정은 심하게든 약하게든 항상 방해를 받아 왔다. 그런데 유독 현대 사회에서는 권력 과정의 붕괴라는 문제가 특히 극심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좌파, 적어도 최근(20세기 중반부터 후기까지)의 좌파는 권력 과정이 붕괴되면서 나타난 박탈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권력 과정의 붕괴
59. 우리는 인간의 욕망을 세 부류로 나눈다. (1)최소한의 노력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 (2)상당한 노력을 치러야만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 (3)아무리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 권력 과정은 그 중에 두번째 부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이다. 세번째 부류의 욕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좌절과 분노, 그리고 궁극적으로 패배주의와 절망도 더 빈번히 생겨나게 된다.
60. 현대 산업사회에서 자연적인 인간의 욕망은 주로 첫번째와 세번째 부류에 속하며, 두번째 부류의 욕망은 점점 더 인위적으로 형성된 욕망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61. 원시 사회에서 생활 필수품은 대개 두번째 욕망에 속한다. 필수품을 구할 수는 있지만, 거기엔 상당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최소한의 노력만으로도 누구나 생활 필수품을 얻는 것이 보장되어 있고, 따라서 신체적 욕구는 첫번째 부류의 욕망으로 전환된다. (직업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력이 정말 '최소한의' 노력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중급 이하 수준의 직업에서 요구되는 노력은 기껏해야 복종하는 노력 정도에 불과하다.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시킨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작업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니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 것이다.)
62. 현대 사회에서의 섹스, 사랑, 신분 등과 같은 사회적 욕구는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흔히 두번째 부류에 머문다. 그러나 특별히 강력한 신분 상승의 욕망을 지닌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회적 욕구를 총족시키는 데 필요한 노력은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63. 그래서 두번째 부류에 속하는 인위적 욕구들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런 인위적 욕구를 채움으로써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대신 채운다. 진보한 광고나 마케팅 기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는 결코 욕망하지 않았을, 아니면 아예 꿈도 꾸지 않았을,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인위적 욕구들을 충족시키려면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또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따라서 인위적 욕구는 두번째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문단 80~82를 보라.) 현대인은 광고와 마케팅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욕구를 추구하면서, 그리고 대리 활동을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64.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권력 과정에 대한 인위적 욕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20세기 전반부의 사회 비평서에서 계속 반복된 주제는 현대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목적 상실감이었다(이 목적 상실감은 흔히 '무규범 상태', 또는 '공허한 중산층'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가 보기엔 이른바 '정체성의 위기'라는 것도 사실은 목적을 찾기 위한, 그리고 흔히 적절한 대리 활동에 몰두할 방법을 찾기 위한 모색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실존주의는 현대의 삶에 목적이 없음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만족'을 위한 모색 활동은 대단히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만족감이 목표인 활동(즉 대리 활동)을 통해서 만족감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대리 활동은 권력에의 욕구를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를 못한다.(문단 41을 보라).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는 생활 필수품, 섹스, 사랑, 신분, 복수 등과 같이 외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는 활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벽히 충족될 수 있다.
65. 아울러 돈을 벌거나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거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체제의 부속품 역할을 수행하면서 목표를 추구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만한 지위에 있지 않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우리가 문단 61에서 지적했듯이 피고용자의 신분이며, 그저 누군가가 시킨 대로 따라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자영업자들의 경우에도 역시 자율성은 제한적이다. 중소기업의 사장들은 언제나 정부의 과도한 규제가 자신들의 손발을 묶어 놓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 같은 규제들 중 일부가 불필요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 부문에서 정부 규제는 극단적으로 복잡한 우리 사회에서는 필수적이고 또 불가피한 것이다. 오늘날 소규모 기업의 상당 부분은 프랜차이즈 제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몇 년 전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많은 프랜차이즈 제공 회사들이 프랜차이즈 희망자들에게 특별한 인성 검사를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그 검사의 목적은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런 사람들은 프랜차이즈 제도를 군소리 없이 따라갈 만큼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자율성을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소규모 사업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6.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스스로 행한 무엇보다는, 체제가 그들을 위해서, 아니면 그들에게 행한 무언가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에도 점점 더 체제가 마련해 놓은 통로를 따라가고 있다. 기회란 것도 체제에 의해 제공되며,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규칙과 규제에 순응해야 한다.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미리 정해 놓은 기법을 따라야만 한다.
67. 우리 사회에서 권력 과정은 진정한 목표의 부재, 그리고 목표 추구에서의 자율성의 부재로 인해 붕괴되고 있다. 권력 과정이 붕괴되는 것은 세번째 부류에 속하는 욕망들 때문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그런 욕망들 말이다. 이제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이 내리는 결정에 좌우된다. 우리는 그런 결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으며, 그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마 5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세계 인구와 비할 때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숫자의 사람들이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 필립 헤이만, 하버드대 법학 교수,<뉴욕 타임즈> 1995.4.21자에서 안토니 루이스가 인용.) 우리의 삶은 핵발전소에서 안전 기준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좌우된다. 얼마나 많은 농약이 음식에 들어가도록 허용되는지. 대기에 오염 물질이 얼마나 허용되는지, 의사가 얼마나 숙련된 사람인지(또는 무능한지)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직업을 잃고 얻는 것도 정부의 경제 부처나 기업 임원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같은 위협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들의 노력은 좌절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곧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68. 짧은 평균 수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원시인은 현대인보다 신체적으로는 더 불안한 삶을 살았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에게 고통을 주는 불안함의 총합은 인간에게 통상적으로 주어지는 불안함보다 적으면 적었지, 더 크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이다. 그러나 심리적 안정은 신체적 안정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같이, 별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는 보호 장치다. 맹수와 배고픔의 위협에 둘려싸여 있지만, 원시인은 자기 방어를 위해 싸울 수 있고 음식을 찾아 먼 길을 여행할 수도 있다. 원시인에겐 노력한 만큼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원시인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원시인과 달리 현대인은 자신이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력 사고, 식품 속의 발암 물질, 환경 공해, 전쟁, 늘어나는 세금, 거대 조직에 의한 사생활 침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전국적인 사회 현상 또는 경제 현상 등이 그런 위협들이다.
69. 물론 원시인 역시 자신을 위협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가령 질병을 그런 위협의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원시인은 질병의 위험조차도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질병은 사물 본성의 한 부분이었으며, 상상 속의 악마의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개인에게 가해지는 위협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그 위협들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은 도저히 영향을 끼칠 수 없는 타인들의 결정에 의해 개인에게 강요된 위협이다. 그러니 그가 좌절과 모욕을 느끼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70. 원시인이 대개의 경우 자기 손(개인으로서건, 아니건 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건)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반면, 현대인의 안전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거나 너무나 거대해서 개인적으로 도저히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타인들이나 조직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그러니 현대인의 안전에 대한 욕망은 첫번째와 세번째 부류의 욕망으로 전락해 버린다. (음식이나 주거지 같은) 일부 영역에서는 아주 조금만 노력해도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밖의 영역에서는 전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현실 상황을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킨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환경이 원시인의 환경과 어떻게 다른지를 개략적으로 보여주는데는 충분할 것이다.)
71. 현대 생활에서 사람들이 지닌 부질없는 욕망 중 상당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좌절되게 마련이고, 그 결과 세번째 부류의 욕망으로 전락한다. 여기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싸움이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많은 경우에 말을 심하게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어디론가 급히 가야 할 때도 있고, 아니면 천천히 움직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통 흐름을 따르고 교통 신호를 지키며 움직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방식으로 작업해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고용주가 정한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현대인은 그런 식으로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규칙과 규제의 그물에 꽁꽁 묶에 있으며, 그 규칙과 규제들은 현대인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그 결과 권력 과정을 교란시킨다. 이 규제들 대부분은 산업 사회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이므로,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72. 어떤 면에서 현대 사회는 극도로 자유 방임적이다. 체제의 기능 수행과 무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의 뭐든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 (그 종교가 체제를 위협하는 행동을 장려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느 종교든 마음대로 믿을 수 있다. ('안전한' 섹스를 실천하는 한) 우리는 누구라도 마음에 드는 상대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중요한 사안에서 체제는 갈수록 우리의 행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73. 명시적인 법률과 정부에 의해서만 행동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통제는 간접적인 강요를 통해서, 심리적 억압 또는 조작을 통해서, 그리고 정부보다는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대형 조직들은 대중의 태도나 행동을 조작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프로파간다를 사용한다. 프로파간다는 '상업 광고'와 홍보에 국한되지 않으며, 때로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이 프로파간다를 만든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오락 프로그램의 내용은 강력한 프로파간다 형식 중의 하나다. 간접적인 강요의 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매일 직장에 출근해야 하고 고용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써있는 법률은 없다. 우리가 원시인들처럼 대자연 속에 살아가는 것, 또는 우리 자신을 위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연은 거의 남아 있질 않으며, 소규모 자영업자를 위한 경제적 공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들 대부분에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다른 사람의 피고용자가 되는 것 뿐이다.
74. 우리는 현대인이 지닌 장수(長壽)에 대한 강박 관념,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육체적 힘과 성적 매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바로 권력 과정에의 욕구 충족이 박탈당한데서 초래된 병적 증상이라고 본다. '중년의 위기' 또한 그 같은 병적 증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된 출산에 대한 무관심은 원시 사회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이다.
75. 원시 사회에서 삶은 일련의 단계들이 지속되는 것이었다. 어느 한 단계의 욕구와 목적이 충족되면 곧장 다음 단계로 망설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젊은 남성은 사냥꾼이 됨으로써 권력 과정을 통과했으며, 이 때 사냥은 스포츠나 만족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량으로 필요한 고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젊은 여성의 경우 그 과정은 좀 더 복잡하다. 우리의 논의는 사회적 권력을 중심으로 한 것이므로, 여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 단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면, 청년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가정을 이루는 책임을 떠맡았다. (대조적으로 현대인들은 수많은 '만족감'을 채우느라 너무나 바쁜 탓에 자녀 갖기를 끝없이 미루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대리 활동이라는 인위적 목표의 달성에서 오는 만족감이 아니라, 정당한 권력 과정을 경험하는 일이다.) 자녀를 제대로 기르고, 자녀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공급하면서 권력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원시인은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느끼며 (그 때까지 그가 살아 있다면) 노년기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대로 많은 현대인은 그들이 육체적 컨디션과 외모, 건강을 지키기 위해 쏟아 붓는 엄청난 노력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적 쇠락과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현대인은 단 한번도 실용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육체적 힘을 사용하지 못하며, 권력 과정을 통과하는데 있어 한번도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현대인의 욕구는 결코 채워지지 않으며, 그것이 노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 것이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매일 자신의 육체를 사용한 원시인은 노화(老化)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동차에서 집까지 걷는 일 말고는 일체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지 않는 현대인이 오히려 노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인생을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만이 인생의 종말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76. 어떤 사람은 우리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권력 과정을 통과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해 줄 방법을 찾아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가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기회의 가치가 훼손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기회를 찾거나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체제가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체제의 사슬에 묶일 수 밖에 없다.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사슬을 벗어 던져야 한다.
일부 사람들이 체제에 적응하는 방법
77. 산업-기술 사회의 모든 사람이 심리적 문제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에 만족하고 있다. 이제 왜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 대해 그렇게도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78. 우선, 의심할 바 없이 사람마다 권력욕이 다르다. 권력욕이 약한 개인들은 상대적으로 권력 과정을 통과해야할 필요성이 적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권력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덜 필요할 수도 있다. 이들은 '옛날 남부(Old South)'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처럼 고분고분한 타입으로, 쉽게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옛날 남부의 '흑인 노예'를 비웃으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자신의 노예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우리가 비웃는 것은 노예 생활에 만족하는 부류들이다.)
79. 어떤 사람들은 권력에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몇 가지 예외적인 욕망을 품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분 상승에 대해 예외적으로 강력한 욕망을 지닌 사람들은 신분 상승이라는 게임에 결코 싫증을 느끼지 않으며 평생을 그저 신분의 사다리를 오르며 보낼 수도 있다.
80.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넘어가는 정도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광고 산업이 그들의 눈 앞에 대고 흔들어 대는 눈부신 신형 장난감을 향한 끝없는 갈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그러니 그들의 수입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경제적으로 궁핍함을 느끼며, 결국 그들의 갈망은 좌절로 이어진다.
81. 어떤 사람들은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돈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물질을 얻는 것으로는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82.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중간 정도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향한 갈망을 채우기에 충분한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시간 외 근무, 부업, 승진을 위한 음모 등)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물질을 얻음으로써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욕망이 완전히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 과정에서 자율성이 부족할 수도 있고(그들의 노동이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이 지닌 (안전, 공격성 등)욕망 중 일부는 좌절될 수도 있다. (문단 80~82에서 우리가 물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순전히 광고 및 마케팅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정한 까닭에 문제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버린 것은 우리의 잘못이다. 물론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83. 어떤 사람들은 강력한 조직이나 대규모 운동과 자신을 동일화시킴으로써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킨다. 목표나 힘을 지니지 못한 개인들은 운동이나 조직에 참여해 운동과 조직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받아들이고 그 목표를 추구하며 일한다. 이들 목표의 일부가 이루어질 경우, 개인은 자신의 노력은 목표 달성에 아주 미미한 힘을 보탰음에도 불구하고, (운동 또는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권력 과정을 통과한 듯한 느낌을 얻게 된다. 파시스트와 나치,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악용했다. 우리 사회 역시 조금 덜 노골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파나마의 독재자 노리에가는 미국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목표:노리에가 처벌), 미국은 파나마를 침공했고(노력), 노리에가를 처벌했다(목표의 달성). 미국은 권력 과정을 통과했고,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을 미국과 동일시했기에 권력 과정을 대리 경험했다. 광범위한 대중이 파나마 침공을 용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즉, 파나마 침공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군대, 기업, 정당, 인권단체, 종교 운동, 이념 운동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특히 좌파 운동들은 권력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거대 조직 또는 대규모 운동에 대한 동일화를 통해서는 권력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84. 사람들이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대리 활동이다. 문단 38~40에서 설명했듯이, 대리 활동은 인위적 목표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개인은 목표 자체의 달성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저 목표를 추구하면서 얻어지는 '만족감'을 위해서 그런 활동에 매달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디빌딩을 통해 우람한 근육을 키우는 것이나, 조그만 공을 구멍으로 집어넣는 것, 기념 우표 세트를 전부 모으는 것 등에는 아무런 실용적인 동기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보디빌딩과 골프와 우표 수집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보다 더 '타인 지향적'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로지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사회가 중요하다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대리 활동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단정지어버린다. 어떤 사람들이 스포츠, 카드 게임, 체스, 학문적 비밀의 추구 등 깨인 의식을 지닌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대리 활동에 불과한 활동, 즉 본질적으로 사소한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정작 권력 과정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은 전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많은 경우에 생활비를 벌는 일조차도 역시 대리 활동이 된다. 생활 필수품을 얻고 높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하고 광고에 의해 촉발된 사치품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은 물론 순수한 대리 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돈과 신분을 훨씬 초과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고 있으며, 바로 그 초과분의 노력이 대리 활동이 되는 것이다.이 초과분의 노력은 거기에 수반되는 정서적 투자와 함께,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체제의 영속적인 발전과 완성을 위한 가장 강력한 잠재력 중의 하나가 된다(문단 131을 보라). 특히 가장 창의적인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조차, 작업은 대부분 대리 활동에 불과하다. 이는 특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잠시 후에 따로 논의하기로 한다(문단 87~92).
85.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끝없는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나 대리 활동에 '코가 꿰인' 사람들,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회 운동이나 조직과 자신을 완전히 일체화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예외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대리 활동이나 조직과의 일체화로는 결코 완전한 충족을 얻을 수 없다(문단 41과 64를 보라). 둘째, 명시적인 규제나 사회화를 통해서 체제가 너무나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통제 때문에 자율성은 사라지고,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 데다가 수많은 욕망을 강하게 억눌러야 하는데서 오는 좌절감은 늘어나는 것이다.
86. 설령 산업-기술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형태의 사회를 반대한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진정한 목표의 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리 활동이나 조직과의 일체화를 통해서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천박한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동기
87. 과학과 기술은 가장 중요한 대리 활동 사례들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과학 연구에 몰두하는 이유가 '호기심'이나 '인류의 행복'을 향한 열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있어 이것이 주된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호기심'이라는 것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정상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고도로 전문화된 문제들을 놓고 씨름한다. 가령, 천문학자나 수학자, 곤충학자가 아이소프로필트라이메틸메탄의 성분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겠는가? 물론 아니다. 그런 것에 호기심을 느낄 사람은 오직 화학자 뿐이며, 화학자가 그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단 하나, 화학이 그의 대리 활동이기 때문이다. 화학자가 새로운 종의 딱정벌레를 정확하게 분류하는 일에 호기심을 느끼겠는가? 아니다. 그 질문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곤충학자 뿐이다. 그리고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 역시 곤충학이 그의 대리 활동이기 때문이다. 만약 화학자나 곤충학자가 생활 필수품을 얻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고, 그러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능력을 과학과는 무관하지만, 흥미로운 방식으로 발휘할 수 있다면, 그들은 아이소프로필트라이메틸메탄이나 딱정벌레의 분류 따위에 대해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대학원의 연구 기금이 바닥난 화학자가 할 수 없이 보험 외판원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화학자는 이제 보험에 관련된 문제에는 대단한 흥미를 보이겠지만, 아이소프로필트메틸메탄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도 두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과학자들이 자신의 작업에 쏟아붓는 시간과 노력이 그저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정상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동기를 '호기심'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88. '인류의 행복' 또한 '호기심'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설명이다. 어떤 과학적 연구는 인류의 행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고고학이나 비교언어학 같은 것이 그 사례다. 몇 가지 다른 과학 분야는 아예 명백한 위험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이 분야의 과학자들은 예방 백신 개발이나 대기 오염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똑같이 자신의 연구에 열광하고 있다.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데 온 마음을 다 바쳤던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박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가 그렇게 온 마음을 바친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열망 때문이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텔러 박사는 왜 다른 '인도주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는가? 그가 그렇게 인도주의자였다면, 도대체 왜 수소폭탄의 개발을 도왔던 것인가? 다른 수많은 과학적 업적과 마찬가지로, 핵발전소가 과연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냐 하는 질문에는 서로 상이한 대답들이 나올 수 있다. 저렴한 전기가 쌓여 가는 핵 폐기물과 원자력 사고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가? 텔러 박사는 질문의 오직 한 측면만을 보았다. 분명히 그가 핵발전소에 온 마음을 다 바친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열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에서 얻어지는, 그리고 연구 결과가 실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얻어지는 개인적 만족감 때문이었다.
89. 과학자들 일반에 대해서도 똑같은 진실이 통용된다. 희귀한 예외를 제외하곤, 그들의 동기는 호기심도 아니고 인류의 행복도 아니다. 진짜 동기는 권력 과정을 통과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목표를 갖는(풀어야 할 과학적 문제), 노력하는 것(연구),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문제의 해결)이다. 과학이 대리 활동인 이유는 과학자들이 주로 연구 그 자체로부터 충족감을 얻기 위해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90. 물론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많은 과학자들에게는 그 밖의 다른 동기들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돈과 신분 같은 동기들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신분 상승에 대해 끊없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일 수도 있고(문단 79를 보라), 이런 욕망이 그들의 연구에 상당한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일반 대중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의 대다수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광고 및 마케팅 기법에 현혹되며, 따라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과학을 무조건 대리 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크게 봤을 때 과학은 역시 대리 활동에 속한다.
91. 한편 과학과 기술은 거대한 권력을 갖고있는 운동이며, 많은 과학자들은 이 거대한 운동에 자신을 일체화함으로써 권력 욕구를 충족시킨다.
92. 따라서 과학은 과학자들과 연구 기금을 제공하는 정부 관료 및 기업 이사들이 지닌 심리적 욕구에만 복종하는 맹목적인 행진일 뿐이다. 그들은 인류의 진정한 행복이라든가 그 밖의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유의 본질
93. 우리는 산업-기술 사회가 인간의 자유를 서서히 침해하지 못하도록 개혁할 수 없음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자유'란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우선 우리가 어떤 종류의 자유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먼저 밝혀 두겠다.
94. 우리가 말하는 '자유'란 권력 과정을 통과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여기에는 대리 활동이라는 인위적 목표가 아니라 진정한 목표가 있어야하며 누구로부터도, 특히 어떤 거대 조직으로부터도, 일체의 간섭이나 조작 또는 감독이 있어서는 안된다. 자유란(개인으로건 아니면 작은 집단의 일원으로서건) 당사자의 존재가 걸린 삶과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음식, 옷, 주거지와 환경 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위협에 대한 방어 능력 등이 그런 문제들이다. 자유란 권력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이다. 누군가(특히 거대 조직이) 우리에게 권력을 행사할 때, 그 권력이 아무리 호의적, 관용적으로 행사되거나, 방임을 허락한다 해도, 우리에겐 자유가 없다. 자유와 체제가 허락하는 방임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문단 72를 보라)
95. 사람들은 우리가 헌법으로 보장된 몇 가지의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헌법적 권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개인적 자유의 정도는 그 사회의 법률이나 정부 형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지닌 경제적,기술적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뉴잉글랜드 지역에 있던 인디언 국가들은 대부분 왕국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 중 상당수는 독재자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회들이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많은 개인적 자유를 허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그 사회들이 지배자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한 효과적 수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회에는 잘 조직된 현대적 경찰도 없었고, 고속 장거리 통신망도 없었으며, 감시 카메라도, 시민들의 개인정보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통제를 피하기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96. 우리의 헌법적 권리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언론의 자유를 예로 들어 알아보자. 우리는 결코 언론의 자유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권리는 정치권력의 집중을 막는 데, 또 정치권력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대중에게 알리는데에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는 개인으로서의 평범한 시민에게는 거의 쓸모가 없다. 대중매체들은 거의 대부분 거대 조직의 통제하에 놓여 있으며, 이 거대 조직들은 체제에 통합되어 있다. 누구라도 약간의 돈만 있으며 인쇄물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인터넷이나 그 밖의 다른 방법을 통해 배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미디어가 쏟아내는 엄청난 정보의 늪에 잠겨 버리고, 결국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들이나 작은 집단들이 말로써 사회의 이목을 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FC가 바로 그 사례이다. 우리가 폭력을 저지르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글을 출판사에 보냈다고 가정해 보라. 출판사는 아마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출판사가 그것을 받아 출판한다 하더라도, 아마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심각한 논문을 읽기보다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오락거리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령 많은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해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금방 자신들이 읽은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미디어가 그들에게 심어 놓은 엄청난 정보들로 머리가 가득차기 때문이다. 우리의 글이 오래도록 기억되게끔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다.
97. 헌법적 권리들은 어떤 면에서는 유용하지만, 그것들은 부르주아적 개념에서의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부르주아들의 자유 개념을 따르자면, '자유로운'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라는 기계의 부품일 뿐이며, 고작해야 사전에 정해지고 제한된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의 자유란 개인의 욕구가 아니라 사회라는 기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자유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자유인'은 경제적 자유가 성장과 진보를 촉진하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누린다. 그가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공적인 비판이 정치 지도자들의 악행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가 공정한 재판의 권리를 갖는 것은, 권력자들이 멋대로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는 것이 사회에 해롭기 때문이다. 사이먼 볼리바(Simon Bolivar)가 취했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가 볼 때, 사람들의 자유는, 오직 그 자유가 진보(그것도 부르주아가 생각하는 진보)를 촉진하는 경우에 한해 허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부르주아 사상가들도 그와 비슷한 자유에 대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 바, 그들에게 자유는 집단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체스터 탄(Chester C. Tan)은 "20세기 중국의 정치 사상" 202페이지에서, 국민당 지도자 후 한민(Hu Han-Min)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 개인에게 권리가 보장되는 이유는 그가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며, 그의 공동체적 삶이 그러한 권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후 한민에게 있어 공동체란 곧 국가 사회 전체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어 259페이지에서 탄은 장 춘매(Chang Chun-Mai, 중국 국가 사회당 당수)에 따르면, 자유는 국가와 전체 인민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오로지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대로밖에는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자유라면,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볼리바나 후 한민, 장 춘매, 또는 기타 부르주아 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이 이론가들의 문제는 그들이 대리 활동으로서 사회 이론들을 발전시키고 적용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론들은, 그 이론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론가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98.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자유는 사람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심리적 통제에 의해 제한 당한다. 게다가 무엇이 자유를 구성하는가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자신들의 진정한 욕구보다는 사회적 관습에 의해 더 많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과잉 사회화된 좌파들은 아마도 자신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잉 사회화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한다 해도, 과잉 사회화된 좌파들이 고도의 사회화를 위해 무거운 심리적 대가를 치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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