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테드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99~170)

역사의 몇 가지 원칙

 

99. 역사가 두 가지 요소들이 합해진 결과라고 생각해보자. 한 요소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패턴을 따라 벌어지는 우발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불규칙한 요소이고, 다른 요소는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향을 따라 구성된 규칙적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룰 것은 장기간에 걸친 경향이다.

 

100. 1원칙.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향에 영향을 미칠만한 작은 변화가 일어날 경우, 그 변화의 효과는 거의 언제나 단기간에 그치며, 역사적 경향은 곧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 (: 한 사회의 정치적 부패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개혁 운동이 단기적 효과 이상을 발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머지 않아 개혁가들의 긴장은 풀리고, 부패가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한 사회의 정치적 부패는 항상 일정한 수준에 머물며, 변한다 해도 사회 진화에 따라 아주 천천히 변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청소 작업은 광범위한 사회 변동이 수반될 경우에 한해 지속될 수 있다. 해당 사회에서의 작은 변화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만약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향에서 작은 변화가 지속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변화가 이미 경향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발을 더 내딛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경향이 바뀌지는 않는다.

 

101. 1원칙은 거의 동어반복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 경향이 작은 변화에도 흔들릴 만큼 불안정한 것이라면, 하나의 확고한 방향을 따라 진행되기보다는 마구잡이로 흘러갈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경향은 결코 장기적인 경향이 될 수 없다.

102.
2원칙.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향을 지속적으로 바꿀만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경우, 그 변화는 사회 전체를 바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는 모든 부분들이 연관지어진 체제이며, 그 다른의 부분들을 동시에 영구히 바꾸지 않고서는 어느 중요 부분도 영구히 바꿀 수 없는 것이다.

103. 3원칙. 장기간에 걸친 역사적 경향을 영구적으로 바꿀 만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경우, 사회 전체에 걸쳐 일어날 변화의 결과를 사전에 미리 예측할 수 없다. (다양한 다른 사회들이 똑같은 변화를 겪고 똑같은 결과를 경험하지 않는 한, 그래서 어느 다른 사회가 똑같은 변화를 겪었을 때 비슷한 결과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예측할 수 있기 전에는, 예측이란 불가능하다.)

104.
4원칙.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종이 위에 설계할 수는 없다. , 어떤 형태의 새로운 사회를 사전에 계획하고 세운 후, 본래의 설계 의도대로 기능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105. 3원칙과 제4원칙은 인간 사회의 복잡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인간 행동의 어떤 변화는 그 사회의 경제와 물리적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경제는 환경에 영향을 미치며, 환경은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경제와 환경의 변화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원인과 결과의 그물망이 너무나 복합적인 탓에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106. 5원칙.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 형태를 선택하지 않는다. 사회는 사회 진화의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바, 그 진화 과정은 인간의 이성적 통제를 벗어나 있다.

107. 5원칙은 다른 네 가지 원칙의 결과이다.

 

108. 결론: 1원칙에 따라, 일반적으로 사회 개혁의 시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가 발전해 가는 방향을 따라 이루어지거나(따라서 개혁은 이미 진행되고있는 변화를 가속시킬 뿐이다.), 아니면 그저 일시적인 효과에 그침으로써 사회는 곧 원래의 상태로 슬며시 되돌아간다. 사회의 어느 중요한 측면의 발전과 같은 방향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면, 개혁은 충분치 않으며 혁명이 필요하다.(혁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무장 봉기를 일으키거나 정부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2원칙에 따라, 혁명은 사회의 어느 한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변화시킨다. 3원칙에 따라, 변화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혹은 바라지 않았던 방식으로 일어난다. 4원칙에 따라, 혁명가나 이상주의자들이 어떤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세운다 해도 그 사회는 결코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109. 미국 독립 혁명 역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미국 독립 “혁명”은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혁명은 아니었다. 그것은 독립 전쟁이었으며, 이후 광범위한 정치적 개혁이 뒤따랐을 뿐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 사회의 발전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영국의 지배로 인해 미국 사회의 발전이 느려지는 것을 막았을 뿐이다. 그들의 정치적 개혁은 어떤 근본적 경향도 바꾸지 않았으며, 미국의 정치 문화가 자연스러운 발전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다. 미국 사회의 모체인 영국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의제 민주주의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독립 전쟁 이전에도 이미 미국인들은 식민지 의회를 통해 상당한 정도의 대의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헌법에 의해 성립된 정치 제도는 영국의 제도와 식민지 의회의 제도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중요한 변화와 함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단히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이미 영어권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었다. 영국과 영국 출신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점유했던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미합중국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축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설령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뚝심이 부족해 독립선언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해도, 오늘 우리들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국과 여전히 긴밀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면서 국회(Congress)와 대통령 대신에 의회(Parliament)와 총리를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게 그거다. 미국 혁명은 우리가 제시한 역사의 원칙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옳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110. 그렇지만, 이 원칙들을 적용할 때는 상식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들은 엄밀하지 못하며, 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그 원칙들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역사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원칙들이 신성불가침의 법칙이 아니라 대략적인 원칙, 또는 일종의 지침으로서 사회의 미래에 대한 순진한 생각들에 대한 부분적 해독제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 둔다. 이 원칙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 원칙들에 어긋나는 결론에 도달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며, 원칙에 어긋나는 결론은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경우에 한해 내려야할 것이다.

 

산업-기술 사회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111. 앞서 든 원칙들을 보면, 산업 체제가 우리의 자유를 점점 침해하는 것을 막는 정도의 방법으로는 산업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산업혁명부터 계속되어 온 하나의 일관된 경향이 있으니, 그것은 기술이 개인의 자유와 지역의 자율성의 희생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체제를 강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술로부터 자유를 보호하겠다는 목적으로 계획된 어떤 변화도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발전 추세와는 대치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런 변화는 역사의 파도에 곧 묻혀버릴 일시적 변화에 그치거나, 아니면 우리 사회의 전체의 본질을 영구적으로 바꿔 놓을 만큼 거대한 변화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의한 결과다. 더구나 사회란 사전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할 것이므로(3원칙), 거기엔 커다란 위험성이 담겨 있다. 자유를 지키면서도 이전의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사회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한 변화는 시작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변화들이 체제를 교란시킨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을 향한 모든 시도들은 너무나 소심한 나머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다. 설령 영구적인 차이를 낳을 만큼 커다란 변화가 시작된다 해도, 그것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효과가 눈에 드러날 때에는 꽁무니를 빼게 될 것이다. 결국, 오로지 체제 전체의 급진적이고 위험하며 예측불가능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자유를 수호하는 영구적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개혁가가 아니라 혁명가만이 변화를 이룰 수 있다.

 

112. 자유를 회복하되 기술의 혜택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은 자유와 기술이 타협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건설하는 순진한 계획을 제시할 것이다. 그런 제안을 내놓는 사람들이 이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지에 대해 전혀 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단 무시하자. 설령 어찌어찌해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일단 세워진다고 해도, 그 사회는 제4원칙을 따라 무너져 버리거나 아니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113. 그러니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자유와 현대 기술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이어질 몇개의 문단들에서 우리는 자유와 기술의 발전이 공존할 수 없는 구체적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자유의 제한은 불가피하다.

 

114. 단락 65~67, 70~73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인은 규칙과 규제의 그물에 사로잡혀있고, 그가 영향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의 행동에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것은 우연이나 거만한 관료들이 횡포를 부린 결과가 아니다. 이는 기술적으로 진보된 모든 사회에서 필요하고 불가피하다. 체제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의 행동을 빈틈없이 규제해야만 한다. 작업장에서 인간은 자신이 지시받은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라인이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관료제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하위 관료들에게 실질적인 재량권을 부여할 경우, 체제가 망가지거나, 각 관료들이 자신의 재량으로 시행한 방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불공정에 대한 문책으로 이어진다. 우리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몇몇 제한들은 제거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거대 조직에 의한 우리의 삶에 대한 규제는 산업-기술 사회의 정상적 기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프로파간다, 교육 기술, “정신 건강” 프로그램 등)심리학적 수단들을 이용해 공식적인 규제 없이도 사람들이 체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스스로 원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115. 체제는 인간에게 점점 더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 방식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한다. 예를 들어, 체제는 과학자, 수학자, 그리고 기술자를 필요로 한다. 체제는 그들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분야들을 공부하도록 아주 무거운 압력이 가해진다. 사람들이 청소년기에 많은 시간을 책상에서 공부하는데 빼앗기면서 보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평범한 청소년들은 그들의 시간을 현실세계와 능동적인 접촉을 하면서 보내기를 원한다. 원시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이 훈련받은 것들은 타고난 인간의 충동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세계에서는, 예를 들어, 소년들은 (소년들이 좋아하는) 능동적인 야외 활동을 하도록 훈련받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기술과 관련된 과목들을 공부하도록 내몰리고 있고 대부분이 마지못해 그것을 한다.

 

116. 체제가 인간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꾸준히 행사하는 압력때문에,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복지에 의존해 사는 사람, 청소년 조직폭력배, 광신도, 반정부 세력, 급진적 환경주의자, 낙오자, 그리고 여러 종류의 반항아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17.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에서 개인의 운명은 그가 직접 영향력을 줄 수 없는 결정들에 달려있다. 기술이 발달한 사회는 아주 많은 사람들과 기계들의 협동을 통해 생산하기 때문에 자치적인 소규모 공동체들로 쪼개어 질 수 없다. 기술 사회는 고도로 구성되어야만 하며 결정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어떤 결정이 100만명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영향을 받는 각 개인은 평균적으로 의사결정의 100만분의 1의 몫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는 공무원, 기업의 임원이나 기술 전문가들이 결정을 내리며, 결정에 대한 투표에서조차 투표 참가자가 너무나 많은 탓에 개인의 투표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인들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주요한 결정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치유할 만한 어떤 납득할 만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체제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려진 결정을 스스로 원하도록 만드는 프로파간다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설령 이 “해결책”이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데에 완벽한 성공을 거두더라도, 이는 모욕적이다.

 

118. 보수주의자들과 몇몇 사람들은 '지방 자치'에 호소한다. 지역 공동체들은 한때 자치권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치는 지역 공동체들이 공공 시설, 컴퓨터 네트워크, 고속도로망, 대중 매체, 현대 의료 체계 등과 같은 거대한 규모의 체제와 연결되고 의존하게 됨에 따라 점점 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 한 지역에 적용된 기술이 종종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또한 자치를 방해한다. 샛강 주변에서의 살충제나 화학약품의 사용은 수백 마일 떨어진 하류의 상수원을 오염시킬 수도 있고, 온실효과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119. 체제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대신 인간의 행동이 체제의 필요에 맞춰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술 체제를 유도하는 것 처럼 보이는 정치적인 혹은 기술적인 이념과는 무관하다. 체제는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적인 필요에 의해 유도되기 때문에 그것은 기술의 잘못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체제는 인간의 필요에 무관심하지만, 인간의 필요가 체제에 유익할 경우에는 그렇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의 필요이지 인간의 필요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굶주린다면 체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체제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공급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침체되어 빠져있거나 반항적이라면 체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할 때 마다, 체제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요구를 봐준다. 그러나, 체제는, 합당한, 학고한, 실용적인 이유에 의해,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를 체제의 필요에 맞추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가해야한다. 너무 많은 쓰레기가 쌓이는가? 정부, 매체, 교육 제도, 환경주의자, 모두들 우리에게 재활용에 관한 대량의 선전을 퍼뜨리고 있다. 더 많은 기술자가 필요한가? 수많은 목소리들이 어린이들에게 과학을 공부하도록 권한다. 아무도 청년들에게 그들이 싫어하는 과목을 공부할 것을 강요하는게 비인간적인지 물어보려 하지 않는다. 숙련된 노동자가 기술적 진보에 의해 직장에서 쫓겨나서 '재교육'을 받아야 하게 될때도, 아무도 그들이 그런식으로 내몰리는 것이 잔인하지 않는가를 물어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기술적인 필요성과 합당한 이유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인간의 필요가 기술적인 필요보다 앞서 놓여진다면 경제 문제, 실업, 물자 부족 및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 건강”의 개념은 많은 부분이 개인이 체제의 필요에 맞게 행동하고 스트레스 징후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120. 체제 내에서 목적의식과 자율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농담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서, 각 직원이 목록의 오직 한 부분만을 조립하도록 하는 대신에 전 목록을 조립하게 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목적의식과 성취동기를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회사는 직원들에게 그들의 작업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율성을 주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실용적인 이유로, 대부분의 경우 매우 제한된 정도로만 행해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서나 직원은 궁극적인 목적에 비교하면 어떤 자율성도 부여받지 못했다. -- 그들의 "자율적인" 노력은 결코 그들 자신이 직접 선택한 목표로 향하지 못했고 오직 회사의 생존과 성장과 같은 고용주의 목표만을 향했다. 그들의 직원에게 그와는 달리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그 회사는 얼마안가 문 닫게될 것이다. 비슷하게, 사회주의 체제의 어떤 사업이든,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력을 사업의 목적에 맞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업은 체제의 일부로서 그 목적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순전히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개인 또는 작은 집단이 산업 사회에서 자율권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소기업의 오너조차도 단지 제한된 자율권을 가진다. 정부의 규제는 별도로 하고라도, 그는 경제 체제에 맞추어야 하고 그것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면, 중소기업인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그 기술을 사용해야만 한다.

 

기술의 “나쁜” 부분은 “좋은” 부분과 분리될 수 없다.

 

121. 산업사회가 자유를 위한 방향으로 개혁될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현대의 기술은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에 의존하는 통합된 체제라는 것이다. 당신은 기술의 “나쁜” 부분을 제거하고 오직 “좋은” 부분만을 취할 수는 없다. 현대 의학을 예로 들어보자. 의학에서의 진보는 화학, 물리학, 생물학, 전산학, 그리고 다른 분야들의 진보에 의존한다. 첨단 의학기술은 기술적으로 진보했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회에서만 감당할 수 있는 비싼 첨단 장비를 필요로 한다. 분명히, 모든 기술적 체제와 그에 필요한 제반 조건들 없이는 의학에서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122. 의학의 진보가 나머지 기술 체제 없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어떤 해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당뇨병에 대한 치료법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당뇨병에 대한 유전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생존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낳을 것이다. 당뇨병을 유발하는 유전자에 대한 자연 선택은 멈추고 그 유전자들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될 것이다.(당뇨병이 완치될 수는 없지만, 인슐린에 의해 억제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이미 어느 정도 발생하고 있다.) 같은 일이 인류의 유전적 퇴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어린이의 암 발생 같은)다른 질병에도 일어날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일종의 우생학 프로그램이나, 인류에 대한 광범위한 유전공학일 것이며, 그러므로 미래의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이나 우연, 또는 (당신의 종교적, 철학적 믿음에 따라)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체제의 생산품이 될 것이다.

 

123. 만약 당신이 거대한 정부가 지금 당신의 생활에 너무 많이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부가 당신 자녀의 유전자를 규제하기 시작할 때까지 한번 기다려보라. 유전공학을 규제하지 않을 경우, 결과는 심각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 유전공학의 도입 후 그러한 규제가 불가피하게 따를 것이다.

 

124. 이 문제에 대한 대부분의 반응은 "의학 윤리"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윤리 규약은 의학의 진보에 대항하여 자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유전공학에 적용되는 윤리 규약은, 실제로는 인간의 유전적 구성을 규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아마도 중상류층)사람들이 유전공학의 “윤리”적인 부분과 윤리적이지 못한 부분을 결정할 것이며, 자신들의 결정을 대중에게 강요할 것이다. 윤리 규약이 전적으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결정되었다고 할지라도, 유전공학의 “윤리”적인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에게 다수의 가치를 강요하게될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를 보호하는 윤리 규약은 인간 유전자 조작을 원천봉쇄하는 것이지만, 당신은 기술 사회가 이런 규약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생명공학의 엄청난 힘이 제시하는 유혹은 거부할 수 없고, 특히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제거하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주니까)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이 명백하게 좋아보이기 때문에, 유전공학을 제한하는 어떠한 규약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불가피하게, 유전공학은 광범위하게, 그러나 오직 산업-기술 체제의 필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사용될 것이다.

기술은 자유를 향한 열망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다.

 

125. 기술과 자유 사이의 타협을 유지하는 것은, 기술이 훨씬 더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고, 반복되는 협상을 통해 계속해서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같은 크기의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힘이 센, 두 이웃의 경우를 상상해보자. 힘 센 사람이 상대의 땅의 일부분을 요구한다. 약한 사람은 거절한다. 힘이 센 사람이 말한다. "좋소. 타협 합시다. 내가 요구한 것의 절반을 주시오." 약한 사람은 굴복하는 수 밖에 없다. 얼마 후에, 힘 센 사람이 땅의 다른 부분을 요구하고, 다시 타협이 이루어지고, 계속 반복한다. 약한 사람에게 일련의 타협을 강요함으로써, 힘이 센 사람은 결국 모든 땅을 얻는다. 기술과 자유의 갈등에서도 그러하다.

 

126. 왜 기술이 자유를 향한 열망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권력인지 설명하겠다.

 

127.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술의 진보는 종종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밝혀지며 나중에 가서는 자유를 매우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옛날 보행자는 그가 원하는 어디든, 어떤 교통 법규도 살피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속도로 갈 수 있었고, 기술적인 지원 체제에 독립적이었다. 자동차가 소개되었을 때, 이것이 인간을 더욱 자유롭게 해줄 것 처럼 보였다. 자동차는 보행자로부터 어떠한 자유도 박탈하지 않았으며,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자동차를 가질 필요가 없었고, 자동차를 갖고 있는 사람은 보행자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의 등장은 곧 사회를 인간의 이동의 자유를 상당히 제한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자동차가 매우 많아졌을 때, 자동차 사용을 광범위하게 규제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는, 자동차를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자신이 원하는 속도로 갈 수는 없다. 그의 움직임은 교통의 흐름과 여러가지 교통법규에 의해 좌우된다. 운전자는 면허 취득, 운행 테스트, 갱신 등록, 보험, 안전 점검, 자동차 할부금 등 여러가지 의무에 묶여 있다. 게다가, 자동차의 사용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 자동차의 등장 이후 도시는 사람들이 자동차 없이는 출퇴근, 쇼핑, 여가활동을 할 수 없도록 재구성되었다. 자동차가 없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그들은 자동차를 사용할 때보다 그들 자신의 이동에 대해 훨씬 더 적은 통제력을 가지게 된다. 보행자의 자유 또한 이제는 극도로 제한된다. 도시에서는 그는 반복해서 멈춰서서, 자동차 통행을 위주로 설계된 교통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 지방에서는 자동차 통행이 고속도로를 따라 걷는 것을 위험하고 불쾌하게 만든다.(우리가 자동차의 사례와 함께 제시한 중요한 논점에 집중하라. 기술의 새로운 요소가 그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으로 도입되었을 때, 그것은 반드시 선택적인 것으로 남아있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에, 새로운 기술은, 사람들이 결국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바꾼다.)

 

128. 기술의 진보가 '대체로' 끊임없이 우리의 자유를 축소시키는 반면에, 전기, 실내 수도관, 고속 장거리 통신 같은 각각의 새로운 기술적 진보는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된다. 누가 감히 이러한 기술, 또는 그 외의 수없이 많은 현대사회의 기술적 진보들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전화기 발명에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전화기는 많은 장점을 제공하면서도 어떠한 단점도 없었다. 하지만 단락 59~76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러한 기술적 진보들이 결합된 결과 보통 사람들의 운명이 더 이상 그 자신이나 그의 이웃, 친구의 손이 아닌, 개인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정치가, 기업 임원, 그리고 익명의 기술자와 관료의 손에 매달려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같은 과정이 미래에도 계속된다. 유전공학을 예로 들어보자. 유전병을 제거하는 유전공학의 도입에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해하고, 많은 고통을 예방한다. 하지만 수많은 유전공학적 개선들은 인간을 우연(혹은 당신의 종교적 믿음에 따라, )의 창조물이 아니라, 공학적 생산품으로 전락시킬 것이다.

 

129. 기술이 강력한 사회적 권력인 또 다른 이유는, 주어진 사회의 배경 속에서 기술적 진보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결코 되돌려 질 수 없다. 일단 어떤 기술 혁신이 도입되면 사람들은 대개 그것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기술은 훨씬 더 진보된 기술적 혁신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신기술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체제 역시 대체로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예를 들어,만약 컴퓨터가 없어진다면 현재의 체제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라.) 그러므로 체제는 더 거대한 기술화(technologization)를 향해,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 기술 체제 전체를 제거하지 않는 한, 기술은 계속해서 자유가 물러서도록 강요한다.

 

130. 기술은 급격히 진보하며, 동시에 많은 부분에서 자유를 위협한다.(인구과밀, 규칙과 규제, 거대조직에 의존하게되는 개인, 프로파간다와 다른 심리학적 기술, 유전공학, 감시 장치와 컴퓨터를 통한 개인의 사생활 침해 등) 자유에 대한 위협 중 어느 하나라도 억제하기 위해서는 길고 어려운 투쟁이 필요하다. 자유를 보호하길 바라는 사람들은 새로운 공격의 압도적인 물량과 그것의 발전 속도에 압도당해, 비참해지고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각각의 위협들과 개별적으로 싸우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오직 기술 체제 전체와 싸울 때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다.

 

131. 기술자들(우리는 이 용어를 훈련을 필요로 하는 전문화된 작업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은 그들의 일에 너무나 열중해 있어서, 그들의 기술과 자유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경우에는 거의 언제나 그들의 기술에 호의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과학자의 경우 명백하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교육자들, 인권단체들, (환경)보호 단체들은 그들의 거창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프로파간다를 비롯한 심리학적 수단들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기업들과 정부 기관은, 그것이 유용하다고 판단될 때, 개인의 사생활에는 신경쓰지 않고 그들에 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법 집행기관은 용의자 내지는 흔히 완전히 결백한 사람들의 헌법상의 권리때문에 종종 불편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권리를 제한하거나 기만하기 위해서 합법적으로(가끔씩 불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한다. 이러한 교육자들, 정부 관료, 그리고 법률가 대부분은 자유, 사생활, 그리고 헌법상의 권리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일과 충돌을 일으킬 때는, 그들은 보통 그들의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느낀다.

 

132. 일반적으로, 처벌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보다는, 보상을 위해 노력할 때, 사람들이 더욱 꾸준히, 잘 노력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과학자들 그리고 다른 기술자들은 대개 그들의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에 의해 고무된다. 그러나 기술에 의한 자유 침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비관적인 노력을 꾸준히 그리고 잘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개혁가들이, 기술적 진보에 의한 자유 침해를 확실하게 막을 견고한 방벽을 쌓아 큰 승리를 거둔다면, 대부분은 이에 안심하고 다른 목표에 관심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연구실에서 바쁘게 지내고, 기술은 진보를 통해 방벽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내 개인에 대해 더욱 강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이 언제나 체제에 더욱 의존하도록 만들 것이다.

 

133. 법률이든, 제도든, 관습이든, 윤리적 규범이든 간에, 어떠한 사회적 장치도 기술에 대항해 영속적인 보호를 제공할 수 없다. 역사는 모든 사회적 장치들은 일시적이며, 결국에는 모두 바뀌거나 무너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는 주어진 문명의 배경에서 영속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유전공학을 인간에게 사용하거나, 또는 자유나 존엄을 위협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사회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여전히 기술은 살아있다. 조만간 사회적 장치들은 무너질 것이다. 아마도 곧, 우리 사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유전 공학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침해는 (기술 문명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현재 환경보호 입법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통해, 사회적 장치를 통해 영속적인 무언가를 얻으려는 시도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년 전만 해도, 환경파괴를 부분적으로나마 막을 수 있는 안전한 법적 방벽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계의 정세 변화로 인해 그 방벽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34. 앞에서 제시한 이유들로 인해, 기술은 자유를 향한 열망보다 더욱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중요한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한다. 다음 수십년 동안 산업-기술 체제는 경제, 환경 문제, 그리고 특히 인간의 행위로 인한 문제(소외, 반란, 적대감, 여러가지 사회적, 심리적 난제들)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 고통이 체제를 붕괴시키기를 바란다. 그러한 혁명이 일어나고 성공한다면, 바로 그 때 자유를 향한 열망이 기술보다 더욱 강력함이 입증될 것이다.

 

135. 단락 125에서 우리는 힘센 이웃에게 일련의 타협을 강요당해, 땅 전부를 빼앗기는 약한 사람의 비유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 힘센 이웃이 병들어서 그가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약한 사람은 힘센 이웃에게 자신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거나, 그를 죽일 수도 있다. 만약 그가 강자를 죽이지 않고 그저 자신의 땅을 되돌려줄 것만을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바보다. 강자가 건강을 회복하면 그는 다시 모든 땅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약자의 유일한 선택은, 기회가 있을 때 강자를 죽이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산업 체제가 병들어 있을 때 파괴하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체제와 타협한다면, 그리고 체제가 회복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우리의 모든 자유를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는 간단한 사회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다.

 

136. 누군가 아직도 기술과 자유를 공존시키기 위해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고 있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간단하고도 단순한 사회 문제들조차 어설프게 다루다가,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해왔다는 사실을 차분히 생각해보기 바란다. 체제는 환경파괴, 정치적 부패, 마약, 가정폭력 같은 간단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137. 환경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당장의 경제적 편의와 우리 후손들을 위한 환경자원 저축이라는 두 가치의 갈등은 단순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권력자들이 지껄이는 헛소리들 외에는 들을 수가 없다. 명확하고 일관된 행동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 후손들은 그 문제들을 그대로 떠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은 서로 다른 파벌 간의 투쟁과 타협으로 점철된다. 어느 때는 한쪽이 주도권을 잡았다가, 어느 때는 다른 쪽이 주도권을 잡는다. 투쟁의 노선은 여론에 따라 계속 바뀐다. 이것은 결코 합리적인 과정이 아니고,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 시간에 제대로 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은 설령 “해결”될 수 있다쳐도, 결코 합리적, 포괄적 계획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각자의 (주로 단기적인)이익을 좇는 수많은 경쟁 집단들이 (대개는 그저 운이 좋아서) 간신히 타협점을 찾아내 해결된다. 우리가 문단 100~106에서 제시했던 역사적 원칙들을 생갹하면,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사회적 계획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138. 그러니 인류는 비교적 간단한 사회 문제조차도 어쩌다 겨우 풀 수 있을 만큼 무능하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자유와 기술의 공존이라는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기술이 분명한 물질적 장점을 제시하는 반면, 자유는 100명의 사람에게 100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 추상적 개념이다. 게다가 자유의 상실은 프로파간다와 달콤한 거짓말로 쉽게 감출 수 있다.

139.
중요한 차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언젠가 우리의 환경 문제가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계획을 통해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환경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것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체제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와 작은 집단의 자율성을 보존하는 것은 체제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 행동을 최대한 통제하는 것이 체제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니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체제가 억지로나마 환경 문제에 대해 합리적이고 신중하게 접근할 수도 있는 반면, 똑같은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체제가 보다 더 치밀하게 (대부분의 경우 자유를 침해할 것 처럼 보이지 않는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 인간 행동을 규제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만의 견해가 아니다. (제임스 윌슨 같은)저명한 사회과학자들 역시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사회화'하는 것이 중요함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

 

혁명이 개혁보다 쉽다.

 

140. 우리는 독자들이 자유와 기술을 화해시키는 방식으로 체제를 개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했기를 희망한다. 산업-기술 체제를 모조리 내다버리고 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는 혁명을 의미한다. 이 혁명이 반드시 무장봉기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의 본질을 뿌리부터 근본적으로 바꿀 것은 분명하다.

 

141. 사람들은 흔히 혁명이 개혁보다 많은 변화를 담고 있으므로 개혁보다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한 조건 하에서 혁명이 개혁보다 훨씬 쉽다. 혁명은 개혁에 비해 사람들을 더욱 강렬하게 사로잡기 때문이다. 개혁 운동은 고작해야 사회의 특정 문제의 해결을 제안할 뿐이다. 혁명 운동은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것을 제안한다. 따라서 (가령 유전 공학과 같은)기술의 어떤 한 분야의 개발과 응용을 효과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일보다는, 아예 기술 체제 전체를 폐기해 버리는 편이 훨씬 더 쉽다. 오로지 유전공학을 제한하는 일에만 열정을 바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조건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산업-기술 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에 몸을 바칠 것이다. 문단 132에서 지적했듯이 기술의 특정 부문을 제한하고자 하는 개혁가들은 그저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가들은 엄청난 보상을 얻기 위해 일한다.

 

142. 변화가 너무 과도하게 진행될 경우에 초래될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개혁은 언제나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일단 혁명의 열기가 사회를 장악하는 날에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수한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그 사실이 이미 증명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진정하게 혁명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 사람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수는 이미 수적으로는 충분했으며, 적극적인 소수였기에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될 수 있었다. 혁명에 관해서는 문단 180~205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인간 행동의 통제

 

143. 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조직 사회는 사회 유기체의 기능 수행을 위해서 인간에게 억압을 가해 왔다. 억압의 종류는 사회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어떤 억압이 육체적인 것(나쁜 음식, 과도한 노동, 환경 공해)이라면, 어떤 억압은 심리적인 것(소음, 인구 과밀, 사회의 요구에 따른 인간 행동의 개조)이었다. 과거에는 인간의 본성은 어느정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달라진다 해도 한정된 범위 안에서 달라졌을 뿐이다. 그 때문에 사회가 사람들을 몰아치는데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인간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을 때, 사태는 겉잡을 수 없게된다. 반란, 범죄, 부패, 노동 기피,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질환, 사망률의 증가, 출산율의 감소 등으로 인해 사회가 붕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사회의 기능 수행이 너무나 비효율적인 탓에 결국 보다 효율적인 다른 형태의 사회로(신속하게 또는 서서히, 정복이나 쇠퇴, 진화를 통해서) 대체되기도 한다.

 

144. 과거에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사회의 발전에 어느정도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을 몰아 세우는 일도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이 바뀌고 있다. 현대 기술이 인간을 개조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145. 사람들을 끔찍하게 불행한 환경에 몰아넣고 나서, 사람들에게 불행을 잊게 만드는 약물을 건네주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SF소설이냐고? 이건 우리 사회에서 이미 어느 정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최근 몇십년 간 우울증 발병률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이 문단 59~76에서 설명한 대로 권력 과정의 붕괴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설령 우리가 틀렸다해도, 우울증의 증가는 분명히 오늘의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환경이 빚어낸 결과다.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환경을 제거하는 대신에,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항우울제를 건네주고 있다. 실제로 항우울제는 개인의 정신 상태를 개조하는 수단이다. 항우울제를 먹어가며, 그 약을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우리도 우울증이 가끔씩 오로지 유전적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예로 든 것은 환경이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의 우울증이다.)

 

146. 항정신성 약물은 현대 사회가 개발 중인 새로운 인간 행동 통제 수단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또 다른 수단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47. 우선 감시 기술을 들 수 있다. 이제 거의 모든 상점과 기타 많은 장소에 숨겨진 비디오 카메라가 설치되어있다. 컴퓨터는 어마어마한 양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한다. 그렇게 얻어진 정보는 (예를 들면 공권력의)물리적 강제력을 대폭 강화시킨다. 이어서 대중매체가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프로파간다를 들 수 있다. 선거에서 승리하고, 상품을 팔고, 여론을 바꾸기 위한 효과적인 기법들이 개발되어 왔다. 오락 산업은 그것이 엄청난 섹스와 폭력을 퍼부을 때조차도 여전히 체제의 중요한 심리적 도구 역할을 수행한다. 오락은 현대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도피 수단이다. 텔레비전과 비디오에 빠져있는 동안 현대인은 스트레스와 불안, 좌절, 불만을 잊어버릴 수 있다. 원시인들은 할 일이 없을 때면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었고, 거기에 불만을 품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그들은 아무런 갈등없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끝없이 무엇인가에 열중하거나, 오락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148. 또 다른 기법들은 감시와 프로파간다를 훨씬 능가한다. 교육은 이제 더 이상 아이가 배운 것을 잊어버리면 엉덩이를 때리고, 잘 기억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식의 간단한 일이 아니다. 교육은 이제 어린이의 성장을 통제하는 과학적 기법이 되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실반 학습 센터(Sylvan Learning Center)는 아이들이 공부에 몰두하도록 만드는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전통적인 학교에서도 점차 심리적 기법들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체제의 기본적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양육” 방법을 배우고, 체제가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하는 방식대로 행동한다. “정신 건강” 프로그램, “중재” 기법들, 심리 요법 등은 겉으로 보기엔 개인의 행복을 위해 고안된 것 같지만, 사실은 개인들이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주입하는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이는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개인이 지닌 태도와 행동이 체제와 갈등을 일으킬 경우, 그 개인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해서 그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는 강력한 세력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개인은 스트레스와 좌절, 패배감으로 인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만약 그가 그저 체제가 요구하는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인생이 훨씬 편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제가 개인을 세뇌해 순응하도록 만듦으로써, 개인의 행복을 위한 선행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아동 학대를 금지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사소한 이유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어린이를 매질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학대의 개념을 훨씬 확대해서 해석한다. 이성적이고 일관된 훈육체계의 한 부분으로서 엉덩이 때리기는 학대에 해당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궁극적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이 아이의 행동을 현존 체제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실제로는, '학대'라는 단어는 체제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조장하는 모든 종류의 어린이 양육 방법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아동 학대” 방지 프로그램이 명백히 무자비하고 잔인한 학대를 막는 범위를 넘어설 때, 그 프로그램은 체제를 위해 인간 행동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149. 예상컨데, 각종 연구를 통해 인간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심리적 기법들의 효과는 끝없이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심리적 기법만 가지고 지금 기술에 의해 창조되고 있는 사회에 맞춰 인간을 개조하기는 힘들 것 같다. 결국에는 이를 위해 생물학적 방법이 이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맥락에서 약물이 이용되고 있음을 언급했다. 신경학이 아마 인간 정신을 개조하는 또 다른 방법을 마련해 줄 것이다. 인간 유전공학은 이미 “유전자 치료”이라는 이름 아래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들이 결국 정신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부분까지 개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150. 문단 134에서 언급했듯이, 산업사회는 한편에는 인간 행동의 문제 때문에, 또 한편에는 경제 문제와 환경 문제 때문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는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체제의 경제 문제와 환경 문제의 상당 부분은 인간의 행동 양식에 의해 빚어진 문제다. 소외, 자기 비하, 절망, 적대감, 반항, 공부 안하는 아이들, 청소년 조직범죄, 불법 약물 복용, 강간, 아동 학대, 기타 범죄, 무분별한 섹스, 10대 임신, 인구 증가, 정치적 부패, 인종 갈등, 민족 갈등, (낙태 찬성론과 반대론 같은)극심한 이념 갈등, 정치적 극단주의, 테러리즘, 사보타주, 반정부 단체, 증오 단체 등 이 모든 것들이 체제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체제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인간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할 것이다.

151.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사회 붕괴 현상은 분명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체제가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삶의 조건들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우리는 앞에서 이 조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권력 과정의 붕괴임을 밝혔다.) 만약 체제가 인간 행동을 완전히 통제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때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분수령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인간이 지닌 인내심의 한계 때문에 (문단 143~144에서 설명한대로) 사회의 발전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업-기술 사회는 심리적 방법이나 생물학적 방법, 아니면 그 둘을 사용해 인간을 개조함으로써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미래의 사회 체제는 인간의 욕구에 맞춰 적응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이 체제의 욕구에 맞춰 적응하게 될 것이다.

 

152. 인간 행동에 대한 기술의 통제가 전체주의적 의도에서, 또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식적 욕망에서 시작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정신에 대한 통제가 하나씩 새롭게 등장할 때, 그것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 반응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알코올 중독을 치료한다든지, 범죄를 줄인다든지, 젊은이들을 과학과 공학 연구에 몰두하도록 한다든지하는 식으로 말이다. 많은 경우에 통제는 인도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과 의사가 우울증 환자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해 줄 때, 의사는 분명히 그 개인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약이 필요한 사람으로부터 약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인 짓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실반 학습 센터에 보내 공부에 열광하는 아이들로 만드는 것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들 중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직업을 얻기 위해 받아야만 했던 전문가 훈련을 다른 이들은 더 이상 받지 않기를, 그리고 자기 자식은 더 이상 세뇌를 통해 컴퓨터 매니아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가 어떤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를 실반 학습 센터에 보낸다.

 

153. 인간 행동에 대한 통제는 정부 당국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다. 그 과정에 저항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각각의 진보는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이익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최소한, 진보를 이루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해악이 나중에는 이익이 되거나, 진보하지 않을 때 빚어지는 해악보다는 진보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해악이 덜 해롭기 때문일 수도 있다(문단 127을 보라). 프로파간다만 해도 아동 학대 금지나 인종 분쟁 근절과 같이 여러 가지 좋은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성교육은 분명히 유용한 것이지만, 성교육으로 인해 (그것이 성공할 경우) 아이들에게 성에 관한 자세를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임무는 가족의 손을 떠나 공교육 체제로 대표되는 국가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다.

 

154. 가령 어린이가 범죄자로 성장할 가능성을 높이는 생물학적 요인이 발견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모종의 유전자 치료법이 그런 요인을 제거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그런 요인을 가진 아이들의 부모는 당연히 아이들을 치료할 것이다. 만약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인간적 행위가 될 것이다. 아이가 커서 범죄자가 되면 불행한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원시 사회에는 첨단 자녀 양육법이나 가혹한 처벌 없이도, 범죄률은 우리 사회에 비해 훨씬 낮다. 현대인이 원시인보다 훨씬 강한 가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높은 범죄율은 현대적 환경이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박 때문임이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 압박에 적응할 수 없고, 아니면 아예 적응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니 잠재적인 범죄 성향을 제거하기 위한 치료법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사람들을 개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체제가 요구하는 조건에 자신을 맞춰 갈 것이다.

 

155. 우리 사회는 체제와 충돌을 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생각이나 행동을 “질병”으로 간주한다. 어느 개인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할 때, 그것은 체제에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개인도 고통을 겪게 되므로, “질병”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체제에 적응하도록 개인을 조작하는 것은 “질병”에 대한 “치료”이고, 좋은 일이다.

 

156. 문단 127에서 우리는 새로 등장한 도구의 사용 여부가 처음에는 선택 사항이었다 해도, 이후에도 선택 사항으로 남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새로운 기술이 그 기술을 이용하지 않고는 개인이 기능을 수행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행동을 통제하는 기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부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세상에서는, 어느 부모라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아이를 그 프로그램에 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열등생이 될 것이고, 따라서 직업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 줄 수 있는, 그러면서 부작용도 없는, 그런 생물학적 치료법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는다면 사회의 전반적인 스트레스 수준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사회는 다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억압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이미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덜어 주는(혹은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잊게 해주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도구의 하나인 이른바 대중 오락에서 벌어지는 일이다(문단 147을 보라). 우리가 대중 오락을 이용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다. 우리에게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잡지를 읽으라고 요구하는 법률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스트레스 해소, 도피 수단으로 점점 더 대중 오락에 의존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TV 방송이 쓰레기라고 불평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텔레비전을 본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텔레비전을 보는 습관을 벗어 던졌다. 하지만 대중 오락을 전혀 이용하지 않으면서 오늘날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창조한 오락거리 말고는 일체의 오락없이 아주 잘 살아왔다.) 만약 오락 산업이 없었다면, 체제는 지금처럼 우리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억압을 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157. 산업 사회가 살아남는다고 가정하면, 기술은 결국 인간 행동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행사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상당 부분 생물학적 토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는 지금까지 별다른 이론(異論)이 없었다. 연구자들이 밝혀 냈듯, 뇌의 특정 부분에 전기 자극을 가함으로써 배고픔, 기쁨, 분노, 공포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가라앉힐 수도 있다. 뇌의 어느 부분을 다치면 기억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으며, 전기 자극에 의해 그렇게 잊혀진 기억이 다시 떠오를 수도 있다. 약물로 환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다. 비물질적인 영혼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영혼이 있다고 해도 인간 행동이 지닌 생물학적 메커니즘의 힘보다는 분명히 약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약물과 전기를 가지고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그렇게 쉽사리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158. 모든 사람이 머리 속에 전기 장치를 달고 정부 당국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는 주장은 아마 황당한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생물학적 간섭에 그토록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동 통제라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기술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뉴런과 호르몬, 고분자이고, 과학은 얼마든지 그런 문제에 달려들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기술적 문제의 해결에 보여준 뛰어난 성적을 생각하면, 인간 행동의 통제에도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질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59. 대중적 저항을 통해 기술의 인간 행동 통제를 막을 수 있을까? 만약 통제가 모조리 한꺼번에 시작된다면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통제는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진보를 통해 등장한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대중적 저항도 있을 수 없다.(문단 127, 132, 153을 볼 것.)

 

160. 이런 이야기가 전부 공상과학 소설처럼 들린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제의 공상과학 소설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산업 혁명은 인간의 환경과 생활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기술이 점차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도 적용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환경과 생활 양식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처럼, 인간 그 자체도 역시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갈림길에 선 인류

 

161.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갔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실험실에서 인간 행동을 조작하기 위한 심리적 또는 생물학적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기술을 사회 체제의 기능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가 더 어렵다. 예를 들어, 교육 심리학의 기술은 그것이 개발된 “실험 학교”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아주 잘 돌아갔겠지만, 그것을 우리의 전체 교육 체제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기가 반드시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교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서 칼과 권총을 빼앗느라 바빠 아이들을 컴퓨터 매니아로 바꿀 새로운 교육법을 써볼 시간이 없다. 인간 행동과 관련된 그 모든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체제는 인간 행동을 통제하는데 그다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당히 고분고분하게 체제의 통제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부르주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편 어떤 식으로든 체제에 저항하는 반항아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복지 거머리, 청소년 폭력배, 광신도, 악마 숭배자, 나치, 급진적 환경주의자, 민병대 등이 그 반항아들이다.

162.
체제는 지금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상대로 필사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인간 행동의 문제다. 만약 체제가 빠른 시일 내에 인간 행동을 통제할 효과적인 수단을 찾아낸다면, 체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체제는 붕괴한다. 우리는 앞으로 몇 십년 안에, 40년에서 100년 사이에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163. 체제가 앞으로 수 십년 간의 위기에서 살아남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 때 쯤이면 사회는 중요한 문제들을 다 해결했거나, 최소한 통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체제가 해결한 문제 중에는 특히 인간을 '사회화'하는 문제, 즉 더 이상 그들의 행동이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순화시키는 문제가 포함된다. 일단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기술은 인간과 그 외 모든 주요 생명체를 포함한 지구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마지막 논리적 귀결점을 향해 진보해 나갈 것이다. 체제는 하나의 단일한 독재적 조직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늘날 정부와 기업들, 그 외 다른 대형 조직들이 서로 협동하고 동시에 경쟁하듯, 협동과 경쟁 관계를 맺고 공존하는 몇 개의 분리된 조직들로 나누어질 수도 있다. 인간의 자유는 거의 전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개인들과 작은 집단들이, 슈퍼 테크놀로지와 온갖 감시 장치로 무장한 물리적 강제력은 물론, 인간을 조작하기 위한 수많은 심리학적, 생물학적 수단을 갖춘 거대 조직과 맞서 싸우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짜 권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조차 아주 제한된 자유만을 누릴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도 역시 규제는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똑같이 정치가들과 기업 임원들은, 그들의 행동이 좁은 한계에 머물러 있는 한, 여전히 권력있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164. 다가오는 몇 십년 간의 위기가 끝나고, 체제의 생존을 위해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 불필요해진다고 해서, 체제가 인간 행동과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기술 개발을 멈출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말라. 오히려, 일단 시련기가 끝나면 체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통제를 더욱 빨리 강화시켜 갈 것이다. 지금 체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체제의 생존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주된 동기가 아니다. 문단 87~90에서 설명했듯,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은 대리 활동으로서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그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흥미롭고 도전해 볼 만한 문제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성장에 간섭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165. 반대로, 이번엔 다가오는 몇 십년 간의 스트레스를 체제가 버티지 못하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만약 체제가 붕괴하면, “혼란의 시대”, 즉 과거의 여러 시대 있었던 것과 유사한 혼란기가 닥쳐올 것이다. 그런 혼란의 시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찌됐든 인간에겐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가장 위험한 사태는 산업 사회가 붕괴 이후 몇 년 내에 다시 건설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특히 권력에 눈이 벌게진 족속들)은 공장들이 다시 돌아가기를 애타게 기다릴 것이 틀림없다.

 

166. 따라서 산업 체제에 의한 인류의 노예화를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임무가 주어진다. 첫째, 우리는 체제 내부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더욱 증가시켜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을 높이거나, 아니면 체제에 저항하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체제를 약화시켜야 한다. 둘째, 체제가 충분히 약해질 때를 대비해 기술과 산업사회를 공격하는 이념을 개발하고 널리 확산시켜야 한다. 그런 이념은, 산업사회가 붕괴되었을 때, 남겨진 잔재를 아예 복구조차 불가능하게 날려버리도록 만들어 줄 것이고, 그러면 체제의 재건설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공장들은 파괴되어야하며, 기술 서적들은 불태워 버려야 한다.

 

인간의 고통

167. 순전히 혁명적 행동으로만 산업 체제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산업 체제는 내재적인 발전의 문제로 인해 심각한 장애에 도달하지 않는 한, 혁명의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체제가 붕괴한다면, 그것은 갑자기 우발적으로 붕괴하거나, 아니면 부분적으론 우발적이되 혁명가들의 힘이 보태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붕괴할 것이다. 만약 붕괴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세계의 인구는 첨단 기술 없이는 먹여 살릴 수 없을 만큼 과도하게 늘어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사망률을 올리는 대신 출산율을 낮춤으로써 인구가 줄어들 수 있을 만큼 점진적으로 붕괴가 이루어진다 해도, 그런 탈산업화의 과정은 여전히 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고, 커다란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기술을 무리 없이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기술 숭배자들이 매 단계마다 격렬히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체제의 붕괴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잔인한 짓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첫째, 혁명가들이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오직 체제가 이미 심각한 문제에 빠져 어차피 결국은 무너지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한편 체제가 더 거대해질수록 그 붕괴로 인해 초래될 결과도 더욱 참혹해진다. 따라서 혁명가들이 붕괴를 앞당기는 것은 오히려 재앙을 줄이는 길이 될 수도 있다.

 

168. 둘째, 우리는 자유와 존엄성의 상실에 대항한 투쟁과 죽음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장수하는 것이나 육체적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는, 자유와 존엄성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 공허하고 목적 없는 삶을 오래 사느니, 생존을 위해서건 대의를 위해서건 싸우다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169. 셋째, 체제가 살아남는다고 해서, 붕괴될 때보다 더 고통이 적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체제는 이미 지금까지도 엄청난 고통을 전 세계에 안겨 주었고, 지금도 계속 고통을 주고 있다. 수백년에 걸쳐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및 자연과 행복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던 고대 문명들은, 산업사회와의 접촉을 통해 일시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만연한 경제 문제, 환경 문제, 사회 문제, 심리 문제들이다. 산업사회의 지배로 인해 빚어진 가공할 결과의 하나는, 전 세계의 전통적 인구 조절 방법들이 전혀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의 인구 폭발이 벌어졌다. 이어서 행운아라고 여겨졌던 서구 국가들에까지 심리적 고통이 확산되었다(문단 44,45를 보라). 오존층 감소, 온실 효과, 그리고 그 외 아직까지 예측 불가능한 환경 문제들로 인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핵 확산에서 볼 수 있듯, 새로운 기술을 독재자와 무책임한 제3세계 국가들의 손에서 안전하게 떼어놓을 수도 없다. 이라크나 북한이 유전공학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한번 생각해 보라.

 

170. “!” 기술 숭배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우리는 기아를 정복하고, 심리적 고통을 제거할 것이고, 모든 사람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겁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들은 200년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예정대로라면 산업혁명은 가난을 몰아내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어야 한다. 실제의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기술 숭배자들은 사회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절망적일 정도로 순진하다. 그들은 사회에 거대한 변화, 겉보기에 바람직한 변화일지라도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변화들이 연이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일부러 무시하거나)모르고 있다.(문단 103을 보라.) 그 결과는 사회의 붕괴다. 기술 숭배자들이 가난과 질병을 몰아내고, 유전공학을 통해 온순하고 행복한 성격의 사람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할 때,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혼란스러운 사회 체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유전공학적 식량 생산 공장을 만들어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구가 무한정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구과밀이 스트레스와 공격성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은 그저 예측할 수 있는 문제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이 보여주듯, 기술 진보가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문제들을 낳을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문단 103을 보라). 실제로 산업혁명 이후 기술은 낡은 문제를 해결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왔다. 그러니 (설령 그들이 해결한다 해도) 기술 숭배자들이 그들의 “멋진 신세계”에서 결함을 제거하는 데는 아주 길고 힘든 시행착오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산업사회가 생존할 때의 고통이, 붕괴될 때의 고통보다 덜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기술은 지금까지 인류를 도저히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곤경으로 몰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