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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171~232)

미래

 

171. 이제 산업 사회가 앞으로의 수십 년을 살아남고 마침내 체제에서 결함을 제거하고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체제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172. 우선 컴퓨터 과학자들이 모든 일을 인간보다 잘 처리하는 인공지능 기계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거대하고 고도로 조직적인 기계 시스템이 모든 노동을 담당할 것이고, 인간의 노력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의 가능성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인간의 감독 없이 기계가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리거나, 아니면 여전히 인간이 기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173. 기계가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전혀 예측할 길이 없다. 그런 기계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만 인류의 운명이 기계의 자비심에 달려 있다는 것 뿐이다. 인류가 기계에게 모든 힘을 넘겨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가 자발적으로 기계에게 힘을 넘겨주거나 기계가 스스로의 의지로 권력을 장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인류가 쉽사리 기계에 종속된 지위로 떨어질 것이며, 결국 기계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리라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따라서 사회 문제들도 점점 더 복잡해짐에 따라, 그리고 기계가 점점 더 지능화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결정권을 기계에게 넘겨줄 것이다. 단순히 기계에 의한 결정이 사람에 의한 결정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마침내는 체제를 계속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결정이 너무나 복잡해져서 인간의 지능으로는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는 그런 단계가 도래할 것이다. 그 단계에서는 기계가 통제권을 장악한다. 이제 인간은 기계를 꺼 버릴 수조차 없다. 기계에 철저히 종속된 인간이 기계를 끈다는 것은 곧 자살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74.
반대로 인간이 기계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경우, 보통 사람도 자동차나 PC 같은 개인 소유 기계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대형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진보된 기술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더 강화된 통제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불필요해진 탓에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체제에 떠넘겨진 쓸모 없는 짐더미가 되어 버린다. 무자비한 엘리트라면, 간단히 엄청난 인구를 죽여 없앨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엘리트라면 프로파간다나 심리적, 생물학적 기술을 활용해 출산율을 줄이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인구를 멸종에 이르게 한 뒤, 남은 세상을 독차지할 것이다. 만약 엘리트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마음 약한 리버럴들이라면 그들은 나머지 인류의 선한 목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신체적 욕구가 충족되고 있는지, 모든 아이들이 심리학적으로 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모든 사람이 유익한 취미 생활로 바쁘게 지내고 있는지,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문제”를 고치는 “치료”를 받고 있는지 꼼꼼히 챙길 것이다. 물론 삶은 너무나 무의미해졌으므로, 사람들은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를 제거하거나, 안전한 취미로 권력 욕망을 “승화”시킬 수 있도록 생물학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공학적 처치를 받아야 한다. 이들 공학적 처치를 받은 사람들은 해당 사회 안에서 행복하긴 하겠지만 결코 자유롭지는 않다. 그들은 가축의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다.

 

175. 이번엔 컴퓨터 과학자들이 인공지능을 개발하는데 실패하고,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계속 필요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래도 기계는 여전히 점점 더 많은 단순 작업을 떠맡을 것이고, 그에 따라 단순 직종에서는 잉여 노동력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현재의 체제 안에서 계속 쓸모 있는 존재로 남으려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훈련을 지적 또는 심리적 이유로 인해 받지 못해 직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상당수에 달한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겐 끝없는 임무가 부과된다. 그들에겐 더 많은 훈련과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하며, 점점 더 거대한 유기체의 세포 같은 존재가 되어 갈 것이므로 더욱 더 믿을만해져야 하고, 순응적이고, 온순해져야 한다. 그들의 작업은 더욱 더 전문화되어 간다. 그래서 그들이 현실의 아주 작은 한 조각에만 몰두하는 탓에, 그들의 노동은 현실 세계와 단절돼 버린다. 체제는 심리적 수단이건, 생물학적 수단이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공학적으로 처치해 온순하게 만들고, 체제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도록 만들고, 권력 욕망을 전문화된 작업으로 '승화'시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회의 사람들이 반드시 온순해져야만 하는가에는 이론이 생겨날 수도 있다. 사회는 경쟁이 쓸모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체제가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경쟁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경쟁이 펼쳐지는 미래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문단 163의 마지막 부분을 볼 것). 한 사람이 자신의 권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밀쳐내고, 권력에의 기회를 박탈해야만 하는 사회. 참으로 끔찍한 사회다.

 

176.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능성들이 서로 결합되는 시나리오도 머리 속에 그려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계가 실질적인 노동을 전부 떠맡는 대신, 인간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상황이 생겨말 수 있다. 서비스 산업의 엄청난 발전에 따라 인간을 위한 직업이 계속 생겨나리라는 주장은 이제까지 줄곧 제기되어 왔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의 구두를 닦아주며, 서로를 택시에 태워주며, 서로를 위한 수공예품을 만들며, 서로의 테이블에서 음식 주문을 기다리며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인류가 이런 꼴이 되다니, 얼마나 경멸스러운 일인가. 그런 아무런 의미 없는 일에 허겁지겁 살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생물학적 또는 심리적인 공학적 처치를 통해 그런 생활 양식에 적합하게 자신을 짜맞추지 않는 한, 사람들은 (마약, 범죄, “광신”, 증오 단체 등) 위험한 배출구를 찾게 될 것이다.

 

177.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위에서 이야기한 시나리오들에 모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나리오들은 그저 우리가 보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결과들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그 시나리오들보다 더 바람직한 장밋빛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가 없다. 만약 산업-기술 체제가 다가오는 40~100년을 살아남는다면, 그 때쯤이면 체제는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일반적 특징들을 거의 확립시켜 놓고 있을 것이다. 개인들은(적어도 체제에 통합되고, 체제를 움직이게 하고, 따라서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부르주아” 유형의 개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 조직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사회화”될 것이며,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상당한 정도로(아마 엄청난 정도로) 우연(또는 신의 의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산물이 아니라 공학의 산물이 될 것이다. 그 무엇이라도 자연에 남겨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 연구를 위해 보존된 잔재에 불과할 것이며, 과학자들이 그것을 감독하고 관리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그것은 순수한 자연이 아니다.) 마지막에는(지금으로부터 몇백년 뒤) 인간이든 아니면 다른 주요 생물이든 간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생명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일단 유전공학을 통해 생물을 개조하기 시작하면, 어느 시점에서 멈춰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아마도 인간과 다른 생물들을 완전히 변형시킬 때까지 개조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178. 그 밖에 다른 어떤 경우가 생겨나든 간에, 분명한 것은 기술을 통해 인간이 완전히 새로운 물리적, 사회적 환경을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새로운 환경은 인류가 자연선택에 따라 육체적, 심리적으로 적응해 온 환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이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는다면, 길고 고통스러운 자연선택 과정을 거쳐야만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보다는 전자가 일어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179. 이 역겨운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전략

 

180. 기술 숭배자들은 우리 모두를 지극히 위험한 놀이기구에 태우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끌고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의 진보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를 들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FC는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멈추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몇가지 방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81. 문단 166에서 말했듯, 현재 주어진 두 가지 중요한 임무는 첫째, 산업 사회의 사회적 스트레스와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일과 둘째, 기술과 산업 체제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고 퍼뜨리는 일이다. 체제가 충분히 스트레스 받고 불안정해지면, 기술에 저항하는 혁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혁명의 양상은 프랑스 혁명 및 러시아 혁명과 비슷할 것이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는 저 존경할만한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점점 늘어나는 스트레스와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혁명가들에 의해 개발된 이념들은 낡은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 혁명가들은 낡은 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낡은 체제에 (프랑스에서의 재정 위기, 러시아의 전쟁 패배 같은)충분한 스트레스가 더해졌을 때 혁명은 낡은 체제를 휩쓸어 버렸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도 그와 동일한 수순을 따른다.

 

182.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에는 대개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하나는 낡은 형태의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가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그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데는 (다행히!)실패했지만, 낡은 사회를 파괴하는데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상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그저 현재의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183. 그러나 어떤 이념이 사람들로부터 열정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이상과 함께 긍정적인 이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념은 무엇에 저항하는 것임과 동시에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제시하는 긍정적 이상은 바로 “자연”, 다시 말해 야생의 자연이다. 여기서 야생의 자연이란, 인간의 관리에서 벗어나 있고 인간의 간섭 및 통제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생물들과 지구가 조화롭게 기능을 수행하는 자연이다. 우리는 야생의 자연 안에 인간성을 포함한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성이란 조직 사회의 규제를 받지 않는, 그리고 우연, 자유 의지, 또는 (당신의 종교 혹은 철학적 견해에 따라)신의 창조물인,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조화롭게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184. 몇가지 이유로 자연은 기술에 대항한 완벽한 대안적 이상이 될 수 있다. (체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자연은 (끝없이 체제의 힘을 확장하려 하는) 기술의 반대편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이 아름답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확실히 자연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급진적 환경주의자들은 이미 자연을 찬양하고 기술에 반대 하는 이념을 확보하고 있다. 자연을 위해 공상적 유토피아나 새로운 사회 질서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 자연은 스스로를 돌본다. 자연은 인간 사회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존재해 온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수많은 인간 사회들은 자연에 큰 피해 입히지 않고 자연과 공존했다. 오로지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해 인간 사회는 자연에 참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자연에 가해지는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어떤 특별한 종류의 사회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산업사회를 몰아내면 된다. 딩연한 이야기지만, 산업사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산업사회는 이미 자연에 엄청난 손상을 입혔고, 그 상처가 회복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편 산업화 이전의 사회들도 자연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산업 사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일단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산업 사회가 사라지면, 자연에 가해지는 최악의 억압이 종식될 것이고, 그러면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조직 사회가 (인간성을 포함해)자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능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산업 사회가 사라진 후 어떤 사회가 생겨나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첨단 기술이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농부가 되거나 목동, 어부, 아니면 사냥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가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첨단 기술과 고속 통신이 사라지면서, 정부를 비롯해 지역 공동체를 통제하는 거대 조직들의 능력도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185. 산업 사회를 제거함으로써 빚어지는 부정적 결과들에 대해서는... 글쎄,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는 없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하는 법이다.

 

186.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적 갈등을 싫어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려운 사회적 이슈에 관해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이 그 이슈에 대해 ‘이것은 무조건 좋고 저것은 무조건 나쁘다’식의 간단한 흑백 논리를 제시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두 가지 수준에서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개발해야 한다.

 

187. 보다 정교한 수준의 이념은 지적이고 신중하며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이 때 추구해야할 목표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 위에서 산업 체제에 저항할 핵심적인 혁명가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체제의 문제와 모호한 성격에 대해, 그리고 체제를 제거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그들은 유능한 사람들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고의로 사실을 왜곡하지도 말아야 하며, 선동적인 표현도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인 호소를 일체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감정에 호소할 경우, 진실을 호도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념이 지닌 지적 품위를 훼손할 만한 일은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188. 두번째 수준의 이념은, 생각없이 살아가는 다수 대중이 기술과 자연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한 언어를 사용해 단순한 형식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두번째 수준에서도 이념을 표현할 때 비겁한 언어나 선동적이고 비이성적인 언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언어를 사용할 경우 신중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을 뒤돌아서게 만들 수도 있다. 비겁하고 선동적인 프로파간다가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없이 사는 변덕스러운 대중은 누군가 더 나은 프로파간다 미끼를 들고 나타나는 즉시 태도를 바꾸어 버린다. 그러니 그런 대중의 열정을 부추기기보다는, 역시 논리적 근거를 통해 헌신적인 소수 사람들의 충성심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체제가 거의 파괴 직전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낡은 세계관이 무너졌을 때, 새로운 지배적 세계관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이념들 간의 마지막 투쟁이 벌어질 경우에는 선동적 프로파간다가 필요할 수도 있다.

 

189. 혁명가들은 그런 마지막 투쟁이 필쳐지기 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편에 서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적극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닌 소수이지, 다수가 아니다. 다수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혁명을 향한 마지막 진격의 날이 올 때까지, 혁명가의 임무는 다수의 얄팍한 지지를 얻어내는 일이 아니라, 깊게 헌신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핵심 집단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다수에 대해서는 새로운 이념이 존재함을 알리고 수시로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헌신적인 소수의 집단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190. 모든 사회적 갈등은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혁명가는 어떤 갈등을 조장해야 할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대다수 사람들과 권력을 소유한 산업 사회의 엘리트(정치가, 과학자, 상류층, 기업 임원, 정부 관료 등) 간에 확실한 갈등의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절대로 혁명가와 대다수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이 그어져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혁명가가 미국인의 과소비 행태를 비난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전략이다. 그 대신에 미국인을, 쓸모없는 쓰레기를 자유의 상실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구입하도록 강요당하는 존재로서, 즉 광고 및 마케팅 산업의 피해자로서 부각시켜야 한다. 어느 쪽이든 둘 다 사실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대중을 세뇌한다는 죄목으로 광고 산업을 비난하든, 아니면 광고 산업이 자신을 세뇌하도록 허용한다는 죄목으로 대중을 비난하든, 그것은 다만 태도의 문제일 뿐이다. 전략의 문제를 놓고 볼 때, 대중을 비난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191. 권력을 소유한 (기술을 지배하는)엘리트와 (기술의 지배를 당하는)일반 대중 간의 갈등 외에 다른 사회적 갈등을 부추길 때에는 실행에 앞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우선, 여타의 갈등들은 정작 중요한 갈등(엘리트와 보통 사람들 간의 갈등, 기술과 자연 간의 갈등)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 또한 여타의 갈등들은, 실제로는 기술 발전을 조장할 수도 있다. 그 갈등에서 갈등 당사자들은 상대방을 짖누르기 위해 기술의 힘을 사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국가 간의 경쟁에서 그런 현상은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한 국가 안의 인종 간 갈등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흑인 지도자들은 기술 권력 엘리트의 자리에 흑인 개인들을 보내는 방법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위한 권력을 획득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즉 더 많은 흑인 정부 관료, 흑인 과학자, 흑인 기업 임원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통해 흑인 지도자들은 오히려 기술 체제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하부 문화를 흡수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권력 엘리트 대() 보통 사람들, 기술 대 자연 간의 갈등 틀에 해당하는 사회적 갈등만을 부추겨야 한다.

 

192. 소수자의 권리를 전투적으로 쟁취하려 할 경우 오히려 인종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게 된다 (문단21, 29를 볼 것). 혁명가는 소수자 집단이 다소간 불이익을 겪더라도 그 불이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산업-기술 체제이며, 체제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인종 간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93. 우리가 생각하는 혁명이 반드시 정부에 대한 무장봉기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폭력은 포함될 수도 있고 배제될 수도 있다. , 우리의 혁명은 절대 정치적 혁명이 되어선 안된다. 정치가 아니라, 기술과 경제에 혁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194. 혁명가는 산업 체제가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고 대다수 사람들이 산업 체제를 명백한 실패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일체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가령 녹색당이 선거를 통해 미국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자신들의 이념을 쇄신하거나 희석시키지 않으려면, 녹색당은 어쩔 수 없이 강경 수단을 동원해 경제 성장을 경제 축소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대량 실업, 생필품 부족 등의 사태가 벌어진다. 설령 초인적인 경영 능력을 발휘해 최악의 사태를 피한다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때까지 중독되어 있던 안락함을 포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불만은 늘어나고 녹색당은 선거에 패배해 요직에서 쫓겨날 것이며, 혁명가들은 좌절에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가들은, 산업 체제 자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사람들이 그 모든 고통은 혁명가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산업 체제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때까지는, 정치 권력을 장악하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기술에 항거하는 혁명의 주체는 아웃사이더들이어야 하며,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어야한다.

 

195. 혁명은 국제적으로, 또 범세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혁명은 결코 국가별로는 수행될 수 없다. 미국인들에게 기술 발전이나 경제 성장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히스테리에 빠져, 우리가 기술에서 뒤쳐지면 일본인들이 우리를 추월할 것이라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저 빌어먹을 로봇!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자동차를 팔아먹는다면 세계는 거꾸로 굴러가게 될 것이다! (국가주의는 기술의 든든한 후원자다.) 보다 합리적인 반론으로는, 만약 비교적 민주적인 국가들이 기술에서 뒤쳐지면, 중국이나 베트남, 북한 같은 못된 독재 국가들이 발전을 계속할 것이고 마침내 그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국가주의의 발흥을 막기 위해서라도, 산업체제에 대한 공격은 가능하다면 모든 국가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산업 체제가 전세계에 걸쳐 거의 동시에 무너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체제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오히려 독재 체제를 낳게 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도 충분하다. 민주적인 산업 체제와 독재자가 통제하는 산업 체제 간의 차이는 산업 체제와 비산업 체제 간의 차이에 비하면 사소한 차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독재자들이 통제하는 산업 체제가 훨씬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다. 독재자가 통제하는 산업 체제는 대개 비효율적이며. 따라서 붕괴할 가능성도 더 높기 때문이다. 쿠바를 보라.

196. 혁명가는 세계 경제를 하나의 단일체로 묶는 시도들을 잘 이용해야 한다. NAFTAGATT 같은 자유무역 협정들은 아마 단기적으로는 환경에 해악을 끼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들 사이의 경제적 종속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오히려 혁명에 도옴이 될 것이다. 만약 세계 경제가 완전히 통합되어 어느 한 중요 국가의 붕괴가 모든 산업 국가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면, 전 세계 차원에서 산업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도 더 쉬워질 것이다.

 

197. 어떤 사람들은 현대인이 자연에 대해 과도한 권력과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인류에 대해서는 훨씬 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거대 조직을 위한 권력과, 개인 및 작은 집단을 위한 권력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항상 모호하다. 무력함과 수동성을 옹호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사람들에겐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집단적 존재로서의 현대인, 즉 산업 체제는 자연에 대해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 권력을 사악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현대의 개인들과 개인들의 작은 집단은 원시인보다도 훨씬 적은 권력을 갖고 있다. “현대인”이 자연에 대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개인들이나 작은 집단이 아니라, 거대 조직들이다. 현대의 보통 개인이 어쩌다 기술 권력을 쥐게 된다 해도, 그의 권력은 아주 제한된 한계 안에서, 그것도 체제의 감독과 통제를 받으면서 허용될 뿐이다. (당신의 모든 일에 면허가 필요하며, 그 면허들에는 규칙과 규제가 따른다.) 개인이 지닌 기술의 권력은 고작해야 체제가 그에게 골라서 건네준 권력에 불과하다. 그가 자연에 대해 지닌 개인적 권력은 아주 미미한 것이다.

198. 원시의 개인들과 작은 집단들은 실제로는 자연에 대해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자연 안에서 권력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원시인에게 식량이 필요할 때, 그는 어떻게 식용식물 뿌리를 찾고 요리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고, 직접 만든 무기로, 어떻게 짐승을 추적해 사냥할지 알고 있었다. 더위와 추위, , 홍수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인이 자연에 입힌 손상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원시 사회의 집단적 권력이 산업 사회의 집단적 권력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약했기 때문이다.

 

199. 무력함과 수동성을 옹호하는 대신에, 우리는 산업 체제의 권력이 파괴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개인들과 작은 집단들의 권력과 자유가 비약적으로 증대되리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200. 산업 체제가 완벽하게 쓰러질 때까지, 혁명가의 유일한 목표는 체제 파괴 뿐이다. 다른 목표들은 중심 목표로부터 관심과 에너지를 분산시킬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만약 혁명가가 기술 파괴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갖게 되면, 그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혁명가가 그런 유혹에 굴복할 경우, 곧바로 기술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현대의 기술은 하나의 통합된, 치밀하게 조직된 체제로서 어떤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선 거의 대부분의 기술을 유지해야만 하고, 따라서 아주 작은 부분을 제외하곤, 기술을 고스란히 살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 예를 들어, 혁명가가 “사회 정의”를 목표로 두었다고 가정해 보자.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사회 정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요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 정의를 강요하기 위해서 혁명가는 중앙 조직과 통제권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고속 장거리 수송 수단과 통신망이 필요하고, 결국 그 수송 및 통신 시스템을 지탱하기 위한 기술 전체가 필요하다. 매사가 그런 식이다. 따라서 사회 정의를 확립하려면 혁명가는 어쩔 수 없이 기술 체제의 거의 전부를 유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기술 체제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모순이 벌어진다.

 

202. 혁명가가 일체의 현대 기술 없이 체제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최소한 통신 기술은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가가 현대 기술을 사용할 경우, 그것은 오직 하나의 목표, 즉 기술 체제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203. 알코올 중독자가 포도주 한 통 옆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다고 생각해 보자. “적당히 마신다면 포도주가 나쁠게 뭐가 있나. 약간의 포도주는 건강에 좋다고들 하잖아! 한 모금만 마시면 괜찮을 거야..." 당신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다. 기술을 가진 인류가 포도주 한 통을 가진 알코올 중독자와 똑같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

 

204. 혁명가들은 최대한 많은 자녀를 낳아야 한다. 사회적 태도들은 상당 수준까지 유전된다는 강력한 과학적 증거가 나와 있다. 어떤 사람의 사회적 태도가 유전인자의 구성에 의한 직접적 결과라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상황에서는 개인의 성격적 특성은 그 사람이 어떤 특정한 사회적 태도를 갖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어 있지만. 그 반론들은 근거가 빈약하며, 대개 이념적 동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어느 경우에든 평균적으로 아이들이 부모와 비슷한 사회적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태도를 유전적 요인이 만드느냐, 아니면 양육환경이 만드느냐 하는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 어느 경우든, 사회적 태도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205. 문제는, 산업 체제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중의 다수가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적은 수의 아이를 낳거나 아예 낳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산업 체제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용인하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세계를 통째로 넘겨주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다음 세대의 혁명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혁명 세대가 스스로를 열심히 번식해야 한다. 그런다고 해서 인구 문제가 크게 악화되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산업 체제를 제거하는 일이다. 일단 산업 체제가 사라지면 세계 인구는 필연적으로 감소한다(문단 167을 볼 것). 반면에 산업 체제가 살아남게 되면, 체제는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는 새로운 기술을 계속 개발할 것이고 인구는 무한정 늘어나게 될 것이다.

 

206. 혁명 전략과 관련해 우리가 확고하게 지켜야 할 사항은 간단하다. 현대 기술의 제거가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하며, 그 목표와 경쟁하는 다른 어떤 목표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에 대해 혁명가는 실증적인 접근 방법을 택해야 한다. 만약 경험에 의해 앞의 문단들에서 추천한 전략들이 전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때는 미련없이 포기해야 한다.

 

 

두 가지의 기술

 

207. 우리가 제안한 혁명에 대해, 역사적으로 기술은 항상 진보해 왔고 단 한번도 후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기술의 후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틀린 것이다.

 

208. 우리는 기술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소규모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조직 의존형 기술이다. 소규모 기술은 소규모 공동체가 외부의 도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조직 의존형 기술은 대규모의 사회 조직에 의존하는 기술이다. 우리는 소규모 기술이 후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직 의존형 기술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 조직이 붕괴할 때 함께 후퇴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도 로마의 소규모 기술은 살아남았다. 영리한 시골 장인(匠人)이라면 누구든 물레방아를 만들 수 있었고, 숙련된 대장장이라면 로마식 제련법에 의해 얼마든지 철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조직 의존형 기술은 후퇴했다. 로마의 대수로는 무너졌고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로마의 도로 건설 기술은 잊혀졌다.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은 잊혀졌으며 최근까지도 유럽 도시들의 하수도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시스템에 머물러 있었다.

209.
기술이 항상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산업 혁명 이전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기술이 소규모 기술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 개발된 기술은 대부분 조직 의존형 기술이다. 냉장고를 예로 들어보자. 공장에서 생산된 부품이나 최첨단 공구들 없이 몇몇 지역 장인(匠人)들이 모여서 냉장고 한 대를 만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적적으로 그들이 냉장고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안정적인 전기 공급 없이는 무용지믈이다. 그러니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들고 발전기를 세워야 한다. 발전기에는 엄청난 구리선이 필요하다. 현대적 공작 기계 없이 구리선을 만드는 일을 상상해 보라. 이번엔 냉동을 위한 냉매(冷媒) 가스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차라리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얼음 창고를 만들거나 음식을 말리고 절여서 보관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210. 그러니 일단 산업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 냉장고 기술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 틀림없다. 다른 조직 의존형 기술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단 이 기술이 한 세대 동안 잊혀지면, 그것을 다시 세우는 데는 그것을 처음 세우는 데 수백 년이 걸린 것처럼 역시 수백 년이 걸릴 것이다. 기술 서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남아 있다고 해도 사방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잔해 속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어떤 산업 사회가 다시 건설되려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이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길고 긴 경제 개발 과정과 사회 조직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미 기술에 저항하는 이념이 지배 이념이 되어 있을 것이며, 설령 그런 이념이 없다 해도, 산업 사회를 재건설하는데 흥미를 느낄 사람은 전혀 없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믿어도 종다. “진보”에 대한 열광은 현대 사회에 국한된 현상일 뿐이며, l7세기 이전까지 그런 현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211. 중세 후기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진보한 네 개의 중심 문명이 있었다. 유럽, 이슬람, 인도, 그리고 극동(중국, 일본, 한국) 문명이다. 이들 문명 중 세 문명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태로 머물렀다. 오직 유럽만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이 그 때 왜 그렇게 역동적으로 변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이런저런 이론을 내세우지만,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기술 사회로의 급속한 발전은 한정된 특수 조건 아래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기술의 후퇴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212. 결국에는 산업-기술 형태의 사회가 다시 발전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500년 혹은 l,000년 뒤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문제는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다.

 

 

좌파의 위험성

 

213. 반항에의 욕구와 운동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좌파나 그와 비슷한 심리적 유형의 사람들은 비좌파적 저항 운동에도 이끌린다. 따라서 운동 내부에 좌파 성향의 사람들이 늘어나고, 비좌파 운동은 좌파 운동으로 변질된다. 그러면서 운동의 기존 목표를 좌파적 목표로 대체해 버리거나, 왜곡시켜 버린다.

 

214. 자연을 찬양하고 기술에 항거하는 운동이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반()좌파적 입장을 고수해야 하며, 좌파와의 협력을 일체 배제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좌파는 야생의 자연, 인간의 자유, 그리고 현대 기술의 제거와는 공존할 수 없다. 좌파는 집단주의적이다. 좌파는 전 세계(자연과 인류 모두를) 하나의 통합체로 묶으려 한다. 이는 조직 사회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삶을 관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기 위해선 첨단 기술이 필요하다. 고속 이동 수단과 통신망 없이는 통합된 세계를 만들 수 없다. 정교한 심리적 기술 없이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 기술적 토대가 없으면 “계획적 사회”를 만들 수 없다. 무엇보다도 좌파를 끌고 가는 동력은 바로 권력에 대한 욕구이다. 그리고 좌파들은 대규모 운동, 대규모 조직과의 동일화를 통해 집단주의적 권력을 추구한다. 좌파는 결코 기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집단주의적 권력의 원천으로서 기술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215. 아니키스트 역시 권력을 추구한다. 다만 개인들 또는 작은 집단들의 권력을 추구할 뿐이다. 그는 개인들과 작은 집단들이 스스로의 삶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가 기술에 저항하는 이유는, 기술로 인해 작은 집단들이 거대 조직에 종속당하기 때문이다.

 

216. 일부 좌파는 기술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기술에 저항하는 것은 그들이 아웃사이더일 경우에 한해서이며, 기술 체제가 비좌파에 의해 통제되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만약 좌파가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래서 좌파가 기술 체제를 언제든 쓸 수 있는 도구로 만든다면, 그들은 그 때부터 열광적으로 기술을 이용하고 기술의 발전을 지원할 것이다. 좌파가 역사에서 끝없이 반복해 왔던 그 패턴 그대로의 행동이다. 러시아 볼셰비키가 아웃사이더였을 때는 검열과 비밀 경찰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고, 소수 민족의 자치권을 외쳤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권력이 넘어오자마자 볼셰비키는 더 철저한 검열을 실시했고 차르 치하에서의 비밀 경찰보다 훨씬 잔인한 비밀 경찰을 창설했다.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억압도 차르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경우, 몇십 년 전 대학에서 좌파가 소수였을 때, 좌파 교수들은 열렬히 학문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가 주도권을 쥔 대학들에서 좌파들은 나머지 모든 사람으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이것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다.) 똑같은 일이 좌파와 기술 사이에도 벌어질 것이다. 일단 기술을 자기 통제 하에 넣고 나면, 좌파는 기술을 이용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억압할 것이다.

 

217. 과거의 혁명에서, 권력에 눈이 먼 좌파들은 처음에는 진보적 성향의 좌파는 물론 비좌파 혁명가들에게도 협력했다. 그 후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양쪽을 모두 배신했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그랬고, 러시아 혁명에서는 볼셰비키가 그랬다. 1938년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쿠바에선 카스트로와 그 일당이 그랬다. 좌파의 지난 역사를 비추어 보았을 때, 오늘날의 비좌파 혁명가들이 좌파와 협력하는 것은 참으로 멍청한 짓이다.

218. 수많은 사상가들이 좌익 이념은 일종의 종교임을 지적해 왔다. 물른 좌익 이념은 일체의 초자연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종교는 아니다. 하지만 좌파에게 있어 좌익 이념은 마치 종교가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심리적 역할을 수행한다. 좌파는 좌익 이념을 믿어야’만’ 한다. 좌익 이념은 좌파의 심리적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신념은 논리나 사실에 의해 쉽게 수정되지 않는다. 그는 좌익 이념이 윤리적으로 “옳다(Right)”는 확고한 신념과, 자신에겐 좌파 윤리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권리 뿐만 아니라 의무도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좌파로 부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신을 좌파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신념 체계를 좌익 이념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좌익 이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나 동성애자 권리 운동, 정치적 올바름 운동 등 관련된 운동 부류들을 모두 지칭할만한 더 적합한 용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들 운동이 과거의 좌파 운동과 강력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단 227~230을 볼 것.)

 

219. 좌익 이념은 전체주의적인 힘이다. 좌익 이념이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곧바로 모든 사적 영역을 침범해 들어가며 모든 사상을 좌파의 틀에 맞춰 뜯어고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좌익 이념이 지닌 사이비 종교적 성격 때문이다. 좌익 이념에 어긋나는 모든 것은 “죄악”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좌익 이념이 전체주의적 세력이 되는 것은 좌파들의 권력에의 욕망 때문이라는 점이다. 좌파는 사회 운동과의 동일화를 통해 권력욕을 충족시키려 하며, 운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달성하도록 협력함으로써 권력 과정을 통과하려 한다 (문단 83을 볼 것). 하지만 운동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에도 좌파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운동이 대리 활동이기 때문이다(문단4l을 볼 것). 즉 좌파의 진정한 동기는 좌익 이념의 표면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진정한 동기는 사회적 목표를 위해 투쟁하고 목표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가 얻게 되는 권력의 느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는 자신이 이미 달성한 목표로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권력 과정에 대한 욕구로 인해 좌파는 항상 새로운 목표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좌파는 소수 민족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한다. 일단 그 목표가 이루어지면 이번엔 소수 민족의 통계적 평등을 이룩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여전히 소수 민족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을 재교육시켜야 한다. 소수 민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누구도 동성애자와 장애인, 뚱뚱한 사람, 노인, 못생긴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대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대중에게 흡연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담뱃갑마다 경고문을 찍어야 한다. 이어서 담배 광고를 금지하지는 못해도, 제한해야 한다. 담배가 불법이 되기 전에는 운동가에게 만족은 결코 있을 수 없고, 담배가 불법이 되고 나면 이번엔 술이, 다음 번엔 인스턴트 음식이 표적이 된다. 운동가들은 아동학대가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엉덩이 때리기까지 금지하고 싶어한다. 엉덩이 때리기를 금지하고 나면, 그 때는 또 그들이 보기에 건전하지 않은 무언가를 금지하려 들 것이다. 금지 대상품목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린이 양육법에 관한 모든 것을 통제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넘어갈 것이다.

 

220. 좌파에게 사회 문제점들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사회적 변화를 이루었다고 가정해 보자. 틀림없이 몇 년 안에 대부분의 좌파는 새로운 불만, 교정해야 할 새로운 사회”악”을 찾아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좌파를 움직이는 동기는 사회의 병패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낸 해결책을 사회에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221. 좌파의 생각과 행동은 그들이 고도로 사회화되어 있는 까닭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잉 사회화된 좌파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추구할 수 없다. 그들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 길은 바로 자신의 윤리관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주입하기 위한 투쟁이다.

 

222. 좌파, 특히 과잉 사회화된 부류들은 에릭 호퍼(Eric Hoffer)의 책 <참된 신자(The True Believer)>에서 말하는 바로 그 의미에서의 “참된 신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참된 신자들이 좌파와 동일한 심리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참된 나치 신자는 참된 좌파 신자와는 확실히 다른 심리적 특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사회 문제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전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참된 신자들은 혁명 운동에 유용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어쩌면 필수적인 구성원일지도 모른다. 이때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사람들도 혁명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에 항거하는 혁명에 참여하는 이들 참된 신자들의 에너지에 어떻게 고삐를 채울 수 있을지 전혀 확신이 서질 않는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참된 신자의 열정을 오로지 기술 파괴에만 국한시킬 수 없을 경우, 참된 신자를 혁명에 끌어들이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또 다른 이상에 몰두하게 된다면, 그는 그 이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기술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문단 220, 221을 볼 것)

 

223. 어떤 독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좌파 이념에 대해 당신들이 지껄인 이야기는 전부 헛소리다. 내가 아는 철수와 영희는 모두 좌파지만, 당신들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성향은 갖고 있지도 않다." 절대 다수의 좌파들이 선량한 사람들로서, 타인의 가치관을 인정해야 한다는 진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가 좌익 이념에 대해 내린 평가는 모든 좌파 개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좌익 이념이 지닌 일반적 성격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운동의 성격이 반드시 그 운동에 참여하는 다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224. 좌파 운동 내부에서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개 가장 심하게 권력에 눈이 먼 유형의 좌파들이다.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만이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일단 권력에 눈먼 자들이 운동의 통제권을 장악하면, 보다 얌전한 다수의 좌파들은 지도자들의 행동에 대해 내심으로는 불만을 품게 되지만, 앞장 서서 지도자들에게 저항하지는 못한다. 얌전한 좌파들은 운동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 믿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들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 어떤 좌파들은 대담하게 나서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해 저항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권력에 눈먼 좌파들이 훨씬 더 조직적이고 훨씬 더 잔인하며, 마키아벨리적이고, 그 때까지 이미 확고한 권력의 토대를 쌓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225. 그런 현상이 러시아와 그 밖의 좌파가 장악한 국가들에서 나타났다. 그와 비슷한 현상으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하기 전, 서구의 좌파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거의 비난하지 않았다. 가끔씩 어쩔 수 없이 소비에트 연방이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곧바로 공산주의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아내려 애썼고, 다시 서방의 잘못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들은 언제나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항한 서방의 군사적 행동을 반대했다. 전 세계의 좌파들이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행동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소련의 행동을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좌파로서의 믿음을 버릴 수 없었기에, 그들은 차마 공산주의에 대해 저항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들이 지배하는 우리의 대학에 있는 좌파들 중 다수가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학문의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226. 따라서 대부분의 좌파들이 개인으로서는 선량하고 관대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좌익 이념 전반이 전체주의적 성향을 지니게 되는 경향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227. 우리의 좌익 이념 논의는 한 가지 심각한 취약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좌파”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 점을 두고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오늘날 좌익 이념은 수많은 운동으로 분열되어 있다. 물론 모든 운동이 좌파 운동은 아니다. 그리고 (급진적 환경주의 등)몇몇 운동들은 좌파들 뿐만 아니라, 철저한 비좌파들을 포함하고 있다. 바라건대 이들 비좌파들은 좌파와 협력하기에 앞서 좌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 두어야할 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좌파들이 다양한 유형의 비좌파들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러니 어떤 개인이 좌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도 흔하다. 좌익 이념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일단 현재까지는 이 선언문에서 언급된 규정을 따른다. 우리가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충고는, 누가 좌파인지를 결정할 때, 자신의 판단을 따르라는 것 뿐이다.

 

228. 하지만 좌익 이념을 가려내기 위한 분류 기준이 있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 이 분류 기준을 곧이 곧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어떤 개인들은 좌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부 기준에 맞아떨어질 수도 있고, 이 분류 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 좌파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판단은 당신 스스로 해야 한다.

 

229. 좌파는 대규모 집단주의를 지향한다. 그는 오직 사회를 위한 개인의 의무와, 개인을 보호할 사회의 의무만을 강조한다. 그는 개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때로 도덕주의자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총기 규제와 성교육, 그 밖의 심리적 “계몽” 교육, 적극적 우대조치, 다문화주의를 지지한다. 그는 스스로를 피해자들과 동일시 한다. 그는 경쟁과 폭력에 반대하면서도, 좌파들의 폭력을 변호한다. 그는 “인종주의”, “성 차별”, “동성애 혐오”, “자본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종 청소”, “사회 변화”, “사회 정의”, “사회적 책임” 같은 좌파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좌파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페미니즘이나 동성애자 권리, 소수민족 권리, 장애인 권리, 동물 권리, 정치적 올바름에 공감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모든 운동에 대해 강하게 공감하는 사람은 거의 확실히 좌파라고 보면 된다.

230. 좌파 중에서도 권력에 눈먼 부류들은 더 위험하다. 흔히 그들은 거만하고, 이념에 대해 교조적으로 접근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좌파는 과잉 사회화 된 부류 중 일부이다. 그들은 자신의 좌파 이념을 공격적으로 반복해서 떠들어댐으로써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조용히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어린이들을 사회화시키고, 개인을 체제에 종속시키는 집단주의적 가치관과 “계몽”적 심리 기법을 확산시킨다. 이들 (우리가 칭하기를)은신 좌파들은 특정 부르주아 유형과 흡사하다. , 이들 사이의 유사성은 실천적 행동이 관련된 한에서 그치며, 이들은 심리, 이념, 그리고 동기의 측면에서 서로 확연히 다르다. 보통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생활 양식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체제의 통제 하에 두려고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전통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 은신 좌파가 사람들을 체제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집단주의 이념의 ‘참된 신자’이기 때문이다. 은신 좌파가 과잉 사회화된 좌파와 구분되는 부분은, 은신 좌파의 저항적 충동이 약하며, 그가 더욱 더 철저하게 사회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잘 사회화된 부르주아와도 구분된다. 그는 내면적으로 깊은 박탈감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 문제에 몸바쳐 일하고 집단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잘 승화된) 권력에의 욕망은 보통 부르주아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결언

 

231. 이 글에는 수많은 부정확한 진술들이 담겨 있으며, 그런 진술들에는 어떻게든 근거 조항들과 유보 조항들을 함께 이야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진술 중 일부는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정보 부족으로 인해, 그리고 지면이 짧은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더 정확하게 공식화하지 못했고, 필요한 근거 조항을 빠짐 없이 글 속에 포함시키지도 못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논의에서는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직관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그런 직관적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이 그저 진실에 어느 정도 가까울 것이라는 정도 밖에는 자신할 수 없다.

 

232.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여기서 그린 그림의 전체적 윤곽이 대체로 정확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우리가 자신할 수 없는 한 가지에 대해 언급하겠다. 우리는 현대적 좌익 이념이 우리 시대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그리고 권력 과정의 붕괴로 인해 빚어진 병적 증상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다. 자신들의 윤리관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함으로써 권력에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과잉 사회화된 부류들은 분명히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열등감, 자기 비하, 무력감, 스스로는 피해자가 아니면서도 피해자들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 등의 병적 심리가 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은 오로지 현대 좌익 이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는 피해자가 아니면서 피해자들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성향은 사실 19세기의 좌익 이념과 초기 기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다. 하지만 그런 운동들에서는 우리가 아는 한, 자기 비하와 같은 병적 증상들이 현대 좌익 이념에서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현대 좌익 이념 이전에는 그런 병적 증상을 지닌 운동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만한 자격이 없다. 이는 역사가들이 주목해야할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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